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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찬 May 04. 2021

욕망의 자유를 찾아서

Ludovic de Saint Sernin

메이플소프의 사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든다. 감추는  없이 전부 드러낸 페니스 사진들과 섹스. 이미지들은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욕망을 강요하듯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나를 욕망하게 만드는 사진은 강렬하게 존재를 드러내는 페니스 사진보다는 오히려 신체의 부드러운 곡선을 담은 사진이다. 폭력적으로 튀어나온 목젖. 단단하지만 부드럽게 흐르는 팔의 곡선. 은근한 은유.

하지만 이 은유적인 사진들도 내게는 여전히 직설적이다.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한 강조는 내 시선을 사진의 프레임 속으로 묶어두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대상을 천천히 탐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내 시선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포르노다! 나는 페니스의 사진을 통해 섹스를 욕망하지만 그것은 억압된 욕망이다.

나는 오히려 메이플소프의 무신경한 표정의 사람들을 찍은 사진에 마음이 끌린다. 무신경한 것, 웃지 않는 것,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 것. 하지만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것…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인물의 신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나의 시선은 드디어 자유롭다. 그중에서도 인물의 가느다란 목은 내 시선을 가장 먼저 끈다. 길게 뻗은 목.

 

로버트 메이플소프, Self Portrait, 1975 (Photo credit : The Robert Mapplethorpe Foundation)


수많은 목들 중에서 나의 시선을 잡아 끄는 목이 있다. 그것은 아마 무신경한 목일 것이다. 나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신경한 목. 그 무신경함은 나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든다. 그것은 은근한 에로티카다. 그것은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감추는 것 속에는 의도가 있지만 무신경한 목은 그 어떤 것도 의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는 이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기에 감출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철저한 무관심). 그것은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 목은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그 무방비 상태의 아름다움, 무방비 상태의 목을 나는 흘겨본다. 그것은 내 욕망을 헐벗음 상태로 드러나게 한다. 그 무신경한 아름다움 앞에 마주한 나의 헐벗음. 찌르고 들어오는 무엇. 나는 아름다운 그 목을, 검고 아름다운 그 피부를 가만히 흘겨볼 수 밖엔 없다. 그것은 아직 누군가에 의해 탐해지지 않았기에 더욱 고결하다. 사진가에 의해 말 되어지지 않은(탐해지지 않은) 관능. 카메라의 시선을 피한채 존재하고 있는 무신경한 그것. 그 무신경함으로 인해 얻은 자유는 내게 쾌락을 준다. 이것은 순수한 섹슈얼리티다! 나는 그때 비로소 사진 속 대상과, 사진 속 대상이 가지는 관능과 연결된다!


나는 비슷한 형태의 욕망을 LDSS(Ludovic de Saint Sernin)의 패션으로부터 찾고자 했다. 나는 루도빅의 패션이 마치 메이플소프의 페니스 사진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완벽한 형태의 페니스다. 프레임 속에서 강렬하게 존재하는 페니스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나는 루도빅의 ‘페니스’를 욕망하는가? 그것은 충분히 아름답고 나의 시선을 끈다. 몸의 아름다운 곡선을 드러내는 실루엣과 은밀하게 훔쳐보는 듯한 디테일들. 그것은 포르노다. 하지만 루도빅의 포르노는 나를 너무 뚫어져라 응시했으므로 나는 그 응시에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것은 내 시선을 꼭 묶어두었다. 그것은 페티시적 욕망이다. 충동에 목매도록 하는, 내 자유를 가두어 놓는 욕망이다. 그 욕망은 ‘나’라는 자아를 잊도록 만든다. 내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내 자아가 아닌 그 페니스에 대한 갈망뿐이기에... 페니스의 이미지 앞에 서 있는 나는 이미 정체성을 잃어버린 나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나는 메이플소프의 사진 속에서 어떤 무관심한 목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같은 그 찌름을 느끼지 못한다. 그곳에는 페니스에 대한 욕망과 페니스의 이미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누군가로부터 소유당하길 원하고 있는 페니스 앞에 속박당한 눈 이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소유를 갈망하는 눈. 우리는 결국 페니스를 소유함으로써만 포르노에 대한 욕망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패션에 너무나 적합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상품으로써의 패션이 가져야 할 덕목으로 완벽한 욕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패션으로부터 순수한 섹슈얼리티를 갈망한다. 어떤 의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무신경한 그 어떤 것으로부터 느끼는 욕망. 그때 비로소 내 신체는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 진정으로 욕망할 것이기에... 개인적으로 그러한 욕망에 대한 제시를,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 무관심한 페니스를 루도빅으로부터 기대해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일 것이며, 단순한 상품으로써의 패션을 초월하는 순수한 패션의 본질은 바로 그런 진정한 소통 속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Ludovic de Saint Sernin 2021 봄 여름 캠페인 (Photo credit : Ludovic de Saint Sernin)






이미지 출처

Mapplethorpe.org

Ludovicdesaintsern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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