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73

by 청화

수진의 집에 머물면서 수빈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기억으로 수진을 되살리려는 것처럼 지난 일을 모조리 끄집어내는 듯했다. 잠시도 수진을 잊지 않으려는 듯했고 그것이 마치 의무인 듯했다. 수빈은 오직 수진과 함께 집에서 머물렀다. 수빈이 외출을 하는 경우는 나와 함께 산책할 때뿐이었다. 그녀와 어린이대공원을 매일 거닐었다. 날이 더워도 했고, 소낙비가 내려도 했다. 실제로 수진은 없었지만 수진과 함께 걸었던 공원을 수진을 닮은 그녀와 동행하는 일이 자주 곤혹스러웠다. 가끔 그녀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도 일었지만 나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녀는 수진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와 적당히 떨어져서 걸었다. 그녀를 수진으로 착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억 속의 수진을 떠올리며 공원을 걸었다. 아직도 수진이 공원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이면 찾아낼 수도 있을 듯 했다. 그녀 곁에 거닐며 잔디밭 위, 나무 아래, 벤치 옆, 상점 안, 놀이터를 수시로 살폈다. 빗속의 수진이 영수를 만나는 순간을 수시로 상상했다. 하지만 나는 수진을 찾지 못했다. 수진을 닮은 그녀는 바로 내 옆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수빈이라는 이름을 억지로 되새겼다.


수진의 이야기만을 듣다가 옷을 갈아입으러 잠시 집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에는 또래처럼 보이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 사이에서 공군 약정복을 입은 군인 한 명이 손잡이를 잡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일병이었는데, 휴가를 나온 모양이었다. 몇 정거장 후, 일병은 지하철에서 혼자 내렸다. 나는 대학생들의 수다를 들으며 멍하니 서 있다가 정 병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군부대에 남았을 수도 있었고, 세상으로 나왔을 수도 있었고, 부대와 바깥의 경계에 서 있을 수도 있었다. 그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어디에 있든 그가 아직도 무사할까. 과거의 정 병장은 군대에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믿지도 못했다. 하지만 버티며 성경 말씀을 붙잡았다. 시련은 그를 얼마나 단련시켰을까. 그는 비로소 경계를 넘었을까. 아니면 그대로 남았을까. 정 병장이 여전히 걱정됐지만, 그의 말대로 우리는 구분할 수 없이 모두 똑같은지도 몰랐다. 우리는 같은 곳에서 같은 곳으로 넘어왔을 뿐이었다. 나는 검은 창가 밖으로 드문드문 지나는 하얀 조명을 눈으로 쫓았다. 같은 곳이 반복되는 것만 같았다.


여름날의 고요한 밤이었다. 수빈과 나는 잠들기 위해 불을 끄고 누워 있었다. 나는 침대 밑에 요를 깔고 누웠고, 수빈은 침대 위에 있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작은 방에 낮게 울렸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어둑한 천정을 바라보고 누웠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곧 방학이 끝나.”


어둠 속에서 듣는 수빈의 목소리는 더욱 수진의 것과 닮은 듯했다.


“나는 휴학하려고. 영수 너는?”


“생각 안 해봤어.”


“그럼 다시 학교로 가는 거야?”


천정 이곳저곳을 눈을 굴려 살폈다. “아마도.”


“괜찮겠어?”


“모르겠어.”


“그럼,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모르겠어.”


“계속 네가 내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비밀번호 바꾸지 않을게.”


수진의 생일. 장마는 이미 끝이 났다. 결국 함께 비를 보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 쉬운 일을 우리는 하지 못한 것이었다. 수진의 막연한 인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등 뒤로 가까워졌다. 그녀가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그냥 잠든 척 했다. 등어깨에 간지러운 감각이 일다가 등허리로 이동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옆에 그녀가 누워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갑자기.” 나는 다그치듯 말했다. “누가 내 몸에 손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그녀는 내 곁에 그대로 누워 속삭이듯 말했다. “수진이는 아니었잖아.”


“그래, 수진이는 아니었지.”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돌아갔다. 어두운 방 안으로 정적이 흘렀다. 나는 눈을 뜬 채로 어스름한 천정을 응시했다. 분명 그녀도 잠에 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긴 침묵 끝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너를 좋아해.”


수진의 목소리였다. 내 가슴이 뛰어 오히려 화가 났다.


“나는 너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았어. 이제 수진이 흉내 내지 마.” 나는 참지 못하고 말을 붙였다. “지금 나는 네가 좋아하던 그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해.”


“수진이가 아니라, 진짜 나도 너를 좋아했어. 나는 수진이를 함께 기억할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너에게 그런 짓을 했지만, 언제부턴가 수진이가 아니라 내가 너를 정말로 좋아하기 시작했어. 아마도 그럴 거야. 나도 혼란스러워서 착각하고 있는 줄 알았어. 이제 더 확실해졌어. 나는 너를 분명히 좋아해. 그러니까 나를 안아주면 안 돼?”


“너는 수진이 아니잖아.”


“서로를 알아본 순간 사실 우리는 끝이 난 거지." 수빈은 묻는 듯, 또는 다짐하는 듯 애매하게 말의 뒤끝을 올렸다.


나는 직접 선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너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느 누구와도 그래. 다시는 수진이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야. 앞으로 더 많은 상처를 받을 거고, 이것저것들이 구분할 수 없이 엉겨 붙을 거야. 가끔은 나도 내가 감당이 안 될 때가 있는데, 그런데 누구에게 그걸 바랄 수 있겠어.”


“나는 너를 좋아했어, 너는 누구를 사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만나서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했어. 그럴수록 진짜 나를 보여줄 수 없었어. 그건 아직도 미안해.”


“이제 나는 괜찮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자.”


“미안해.”


우리는 잠시 어둠 속에서 침묵했다.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대화를 하고 싶었다.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방에는 수빈과 영수뿐이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침대를 바라보았다. 수빈의 윤곽이 희미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몸을 뒤척였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모호하게 거리를 유지하다가 언젠가는 서로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겠지. 그래도 나는 괜찮아. 우리가 서로에게서 아주 천천히 자연스럽게 사라져갔으면 좋겠어. 수진이도 서서히 잊을 거고, 우리의 상처도 천천히 나을 거야.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아주 많이.”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


우리는 적당히 떨어진 채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나는 눈을 뜨자마자 나갈 채비를 했다. 수빈은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잠시 수빈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집을 나왔다.

이전 04화평행선의 교점 # 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