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77

by 청화

날이 점차 추워졌다. 매일같이 대학에서 강의를 듣고, 과외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치아 교정을 진행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지만 쓸린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시험기간을 핑계 삼아 아버지도 수빈도 찾지 않았다. 주로 도서관에 갔는데, 빈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서로 다닥다닥 붙어 앉을 정도였다. 대학에 학생이 이렇게 많으면서 공부할 자리는 부족한 것 같았다. 몇 사람은 빈자리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대며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나도 한 층씩 올라가며 빈자리를 물색했지만, 좋은 자리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입구로 돌아왔다. 가장 인기가 없는 층계 입구 바로 앞에 자리가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이제는 앉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나는 냉큼 자리에 앉아 전공 교재와 공책을 폈다. 증명을 읽어 내려갔다. 문장과 다음 문장 사이의 논리적인 비약이 커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증명은 무책임했다. ‘자명하다’라는 말로 증명을 한 줄에 끝내기도 했다. 한참 증명을 내려가다가도 ‘일반성을 잃지 않고’라는 말로 내게 혼란을 주었다. 때로는 ‘위와 같은 방법으로’라는 말로 몇 줄을 한 문장으로 줄였다. 곤혹스러웠다. 필기도 자세하게 써 놓지 않은 탓에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문장과 문장 사이를 메우기 위해 머리를 싸맸다. 따라도 써보고, 지난 단원에서 증명한 명제들도 다시 찾아 읽었다.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지 않았다. 간결한 증명일수록 그 사이에 더 많은 지식을 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따라갈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교재의 앞쪽을 뒤적였다. 교재 위로 흐릿한 그림자가 들더니 주변에 머물렀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보았다. 등 뒤에 바짝 붙어 누군가 나의 교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놀라 이름을 불렀다. “인영아.”


내가 목소리를 내자 주위 학생들의 시선이 내게로 단숨에 쏠렸다. 인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층계 쪽을 가리켰다. 나는 인영을 따라 나갔다. 인영은 나가는 길이었고, 나도 이제 나갈 참이라 했다. 나는 인영을 잠시 두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쌌다. 내가 자리를 치우자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곧바로 차지했다. 나는 인영과 조용히 1층으로 내려와 도서관을 나갔다.


길을 걸으며 내가 말했다. “내가 거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몰랐지. 오늘 취업스터디 있어서 내려오는 길에 본 거야.” 인영은 휴대폰을 확인하더니 말을 이었다. “미안한데, 나 잠깐 어디 들렸다 가야 되겠다.”


“버스 타? 지하철 타?”


“지하철.”


인영과 같은 방향이라 나는 역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인영은 도서관 뒷길로 들어갔고, 나는 역으로 향했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나는 지난 일을 곱씹으며 개찰구 앞 의자에 앉았다. 과음한 날, 그날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인영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인지 우리의 대화는 어색하지 않았다. 나도 잠시 당황했을 뿐, 이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날 아마 서로에게 아무 일도 없던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없는 일이나 다름이 없었다. 실제로 겪은 일보다 기억이 중요했고,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나는 더 이상 인영과 함께했던 그날의 기억을 일부러 더듬지 않기로 했다.

금세 인영에게서 출발한다는 연락이 왔고, 곧 인영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는 개찰구를 지나 승강장에 섰다. 안전문 뒤로 선로가 어렴풋이 보였다. 초점을 당겨오자 안전문 위로 내 모습이 흐릿하게 겹쳤다. 그 옆에 인영도 있었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곧 전철이 선로 위를 빠르게 지났다.


“취업 준비는 잘돼 가?”


“아마?”


“역시, 인영이네.”


“방학부터 내내 취업 준비하느라 정신없었어. 자소서도 쓰고 면접 준비도 급하게 했어. 지금까지 공부는 열심히 했으니까 학점은 괜찮은데, 대외활동이나 그런 외부 활동이 부족해. 만날 앉아서 수학만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지하철이 멈춰 섰고, 안전문이 열렸다. 뒤늦게 전철의 문이 열렸다. 퇴근 시간이 지난 탓에 자리가 많았다. 우리는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인영이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영어 시험 보러 갔어. 동네 초등학교로.”


“잘 봤어?”


“성적이 오르기는 했어. 오랜만에 시험 보러 가서 그런지, 뭔가 이상하게 바뀌었던데?”


“뭐가?”


“고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파란색 덧신을 나눠주는 거야. 신발 위에 덧신을 신으래. 나는 이해가 안 돼서 물어봤지. 그 이유가 소리 때문에 그렇대. 그런 거 있잖아. 시험 보는 중에 발로 바닥을 툭툭 친다거나, 바닥에 쓸려서 거슬리는 소리를 낸다거나, 그런 항의가 많아서 아예 부드러운 덧신을 신고 시험을 치기로 정한 거야. 입구에서 사람들이 덧신을 신고 들어가잖아? 그러면 걸을 때 소리가 하나도 안 나. 그게 생각보다 되게 이상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복도를 걷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안 들려. 그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통제된 기분. 뭔가……. 사람들의 일부가 제거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기분이 좀 이상했어. 시험을 조용히 치르는 것도 중요하기는 한데, 시험 치러 온 몇 백 명의 사람들이 다 덧신을 신고 있다는 게 좀 불쌍하다고 해야 되나? 꼭 이렇게 까지 해야 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잘 모르겠어.”


차내로 주행소리가 크게 울렸다가 사그라졌다.


나는 인영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힘들지 않아?”


인영의 웃음이 서서히 엷어졌다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지는 않아. 다만, 아쉬울 뿐이야.”


“뭐가 아쉬운데?” 인영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아니야 그런 거. 오랜만에 생각이란 걸 하는 것 같아서 어색해서 그래.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너무 오랜만에 들여다보는 느낌이야. 생각보다 되게 복잡해.”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


인영은 생각보다 한참동안 말하지 않았다. 지하철은 다음 역에 도착했고, 다시 출발했다. 나는 흔들리는 손잡이 올려다보면서 인영을 기다렸다. 그 다음 역으로 가는 중에 인영이 입을 뗐다.


“나는 지금 이런 것 같아. 음…….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내가 직접 정한 목표가 대학원 진학이었는데, 결국 포기해야 했잖아. 내가 처음으로 그은 선이었는데, 그런 건 아무 소용없었어. 다시 그 나이에 맞게, 내 상황에 맞게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선을 넘어야만 하는 거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학 다음에 결국 취업 선에 도착했어. 그게 조금 아쉽고 속상해. 내가 예전부터 목표한 게 사라졌으니까. 근데 어쩔 수 없잖아, 다 그렇게 하는 걸. 인정하려고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이번 취업 선을 넘으면, 그 다음에 또 내 나름 무슨 선을 스스로 정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정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거든. 어차피 사라질 선일텐데. 그럼 나는 취업 다음에, 예를 들면 결혼? 그런 선을 넘어야 할 테고, 승진? 그런 선도 있을 테고. 내게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을 것 같은 그런 무수한 선을 넘을 수밖에 없겠지. 그게 싫다기보다 안타까워. 모두가 그러고 있는 것 같아서. 가뜩이나 요즘은 취업도 어렵잖아.”


“대학원에 가지 않는 거,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네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었잖아.”


“아니야 차라리 잘 된 거야. 나는 재능도 없고, 그렇다고 인내심도 없어. 지금은 애초에 수학을 하지 않은 게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해.”


“진심이야?”


“응. 나는 하고 싶은 수학이 없었어. 그냥 수학을 하고 싶었던 거야.”


“그 둘이 달라?”


“다르지. 살고 싶은 삶이 있어, 삶을 살고 싶어. 이 둘도 다르게 들리잖아.” 내가 잠시 그 두 문장을 비교하고 있을 때 인영이 말을 이었다. “경험 삼아 면접 하나를 봤어. 수학교육 관련 회사. 교재나 관련 콘텐츠 만드는 회사인데 이제 막 시작하는 곳이었어.”


“어땠어?”


“별로였어.” 인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여기 회사 비전이나 문화가 좋아 보여서 지원했거든. 요즘 모든 교육 회사가 그런 리드를 내걸 긴 해. 평등한 교육 기회와 질 높은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것 말이야. 그래도 여기는 그 말에 뭔가 책임지고 진심인 것처럼 보였어. 이유는 없는데, 그냥 느낌이 그랬어. 그래서 용기내서 지원을 했고, 감사하게도 면접 기회를 주셨고.”


“잘됐다.”


“가서 수능 수학 문제를 풀었어. 사 점짜리 문제였는데, 사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 맨 마지막 문제는 창의력 문제가 나왔어. 커뮤니티나 예능에 자주 나올만한 창의력 문제. 나는 고민하다가 그건 안 풀었어. 경험 삼아 보는 면접이니까. 갑자기 궁금한 거야. 내가 이 문제를 못 풀면 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갑자기 호기심이 들었어. 그래서 그 문제는 백지로 냈어.”


나는 인영에게도 그런 장난스러운 모습이 있었는지 내심 놀랐다.


인영이 말을 이었다. “면접에는 두 명이 들어왔는데, 한 명은 그 회사 대표였어. 먼저 수능 문제 풀이를 부탁하기에 칠판에 판서를 하면서 설명하고 앉았지. 면접관들이 고개를 끄덕였어. 그냥저냥 잘 넘어간 것 같았어. 그 사람들이 내가 푼 문제지를 넘기다가 맨 마지막 문제에서 멈추더니 묻는 거야. 맨 마지막 문제는 못 풀었네요? 하고. 그래서 나는 네, 좀 어려워서요, 하고 대답했어. 그러니까 면접관이 그러는 거야, 틀에 박힌 문제는 잘 푸는데 일반적이지 않은 문제는 잘 못 푸는 것 같다고. 솔직히 그 말에 크게 웃을 뻔했어. 내가 일반적이지 않은 문제는 못 푼다? 그 창의력 문제 하나 백지로 낸 걸로 그렇게 말한다는 게 어이가 없는 거야. 내가 대학원 가려고 얼마나 많은 문제를 풀고 고민하면서 살았는데, 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 일주일 동안 종이랑 연필만 들고 지낸 적도 있어. 우스운 게, 사실 그들은 살면서 그런 적 없을 거 아니야. 그게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고. 그런데 고작 그 문제 하나 못 풀었다고 그렇게 말한다니, 진짜 어이도 없고 웃긴 거지. 그런 걸 떠나서 그 문제를 진짜 창의력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해. 그 문제는 실제로 어떤 예능 프로에서도 나온 문제야. 내가 그 프로를 좋아해서 만날 봐서 알거든. 그럼 그 예능을 본 사람도 푸는 거잖아. 근데 그게 어떻게 창의력 문제야? 진짜 창의력 문제를 낼 거면 정말 누구나 처음 보는 문제를 만들어서 내야지, 안 그래? 창의력 문제를 직접 만들지 못해서 어디서 그대로 베껴 왔으면서 내가 창의력 문제를 못 풀었다고 지적하는 거야. 내가 다 창피했어. 진짜 창피하지 않아?”


인영이 낯설게 느껴져 눈치를 보다가 답했다. “그러네.”


“아무튼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꽤 편안한 분위기에서 면접이 진행됐어. 거의 끝날 쯤에는 나한테 묻는 거야, 질문 없는지.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그 회사에 목표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 왜 하필 수학인지, 다른 과목도 많은데, 왜 하필 수학과 관련된 회사를 시작한 건지. 사실 내심 기대했어. 자기 고민과 생각이라거나, 그 회사의 목표에 부합하는 이야기를 기대했거든. 그런데 그 사람이 뭐라는지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학은 시장성이 좋아서 그렇대.” 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나는 완전히 실망했어. 정말 완전히. 그나마 이 회사는 괜찮은 곳 같았는데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까 혼란스러웠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복잡하고 답답하고 의욕도 잃고. 내가 마음 붙이고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싶었어. 근데 감사하게 졸업하고 입사하라는 연락이 왔어.”


“진짜? 잘됐다.”


“안 간다고 했어.”


“왜?”


“그냥. 아닌 것 같아서.”


“네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런 거지.”


지하철이 곡선 구간으로 진입하며 덜컹거렸다. 인영이 갑자기 외치듯 말했다.


“왜 삶으로는 증명하려고 하지 않지?” 분명히 인영은 화가 난 상태였다. “이해가 안 돼. 평등한 교육을 한다면서? 질 높은 내용을 만든다면서? 근데 실제로는 왜 다른 소리를 하는 거야? 그 사람들, 말은 번지르르한데 막상 태도를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다 허울뿐이야. 모두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어.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몰라서 그래.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베껴서 그대로 말하고 있는 거야. 자기 얘기는 하나도 없고.”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어?”


“없어. 하지만 시도하는 사람은 분명 알아볼 수 있어.”


“그럼 나는?”


“너? 당연히 너는 자신을 알아가는 사람이지.”


“내가?”


“응.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었을 거야.”


“그런가?”


“당연하지.” 인영은 말을 붙였다. “나는 천천히 다시 생각하면서 취업 준비를 해야겠어. 내게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론 내가 처한 현실도 고려할 거야. 졸업하고 반드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야지. 어떤 직군에 들어가면 좋을지 더 고민해야겠어.”


나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도망가고 싶지 않아? 아니면 쉬고 싶다거나.”


“글쎄……” 인영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입으로만 웃어보였다. “이제 나는 갈 곳이 없어. 지금 주어진 이 선을 넘지 않으면 나는 여기 그대로 남게 될 거야. 그러면 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할지도 몰라.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어. 나는 그걸 넘어야 해. 내가 갈 수 있는 다른 곳은 없다는 걸 나는 확실히 알아. 남거나 아니면 넘거나, 둘 중 하나야.”


지하철의 소음이 차내로 들이쳤다. 선로와 바퀴가 맞부딪히는지 날카로운 소리가 선득 올라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정말 미안한데, 아버지 얘기 물어봐도 돼?”


“이제는 괜찮은 것 같아. 그리고 네가 묻는 거잖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게 바로 믿겨졌어?”


“아니. 장례식이 끝나고도 실감이 안 났어. 집 어딘가에 계속 계신 것 같고. 자고 일어나면 안방에서 나오실 것 같았어.”


“그거 오래 가?”


“나는 좀 오래 갔어.”


“그렇구나.”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인영은 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정면을 응시했다. 지하철 운행에 맞게 우리의 몸은 좌우로 조금씩 흔들렸다. 반대편 검은 유리창 위로는 우리의 모습이 비췄다. 인영은 어쩐지 지쳐 보였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다음 역에 도착하자 승강장의 빛이 환하게 들어 유리창 위에 비치던 우리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다시 지하철이 출발하고 우리의 모습이 다시 창 위에 드러났다. 인영이 내게 해준 이야기 때문인지 내 옆에 앉은 인영은 인영답지 않은 듯했다. 예전처럼 침묵도 편안하지가 않았다. 나는 책가방을 열며 말했다.


“지금 시간 괜찮으면 증명 하나 물어봐도 돼? 너무 어려워서.”


인영은 반가운 듯 밝게 답했다. “당연히 되지. 뭔데?”


나는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도서관에서 마지막까지 시도하던 증명을 보여주었다. 인영은 진중한 눈빛으로 증명을 읽어 내려가더니 막힘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논리를 빠짐없이 메웠다. 설명을 들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지만, 인영은 몇 번이고 다시 설명을 반복했고 더 쉬운 언어를 쓰기 위해 노력했다. 증명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정리들도 모두 꾀고 있었다. 증명 하나를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부가 되었다.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인영의 설명은 성실했다. 증명의 마지막, 작은 검은색 사각형 기호에 닿자 인영이 말했다.


“재밌다. 역시 난 등호가 좋아. 등호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내가 전혀 몰랐던 곳에 도착해 있는 기분이야. 그 끝에 닿았을 때는 지금까지 따라온 기호와 등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의미가 있었던 것 같거든.” 인영은 나에게 실쭉 웃어 보이더니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역을 확인하는 듯했다. “역 놓쳤다. 전에 내렸어야 했는데.”


“그랬어? 미안.”


“괜찮아. 늦은 건 아니야. 다음 역에서 내릴게.”


“고마워. 덕분에 꽤 이해한 것 같아.”


“별거 아니야. 모르는 거 있으면 다음에 또 물어봐. 언제든지 환영이야.” 인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하철이 정차했고 그녀는 내게 손을 저으며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봐.”


지하철 문이 닫히고, 다음 정거장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시 공책을 보고 증명을 읽었다. 혼자서 다시 증명을 이해하려니 인영이 곁에 있을 때보다 어려웠다. 나는 책을 덮어 가방에 넣었다. 한가한 전철 내부를 두리번대다가 검은 창가에 비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긴 좌석에 나홀로 앉아 있었다.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나만을 응시했다. 나는 이내 가방에서 책을 다시 꺼냈다. 증명을 반드시 혼자서 이해하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내내 고개를 숙여 교재를 읽었다. 정의를 받아들이고 증명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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