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성적은 처참했지만 속상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르게 축구를 좋아하는 학생은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한동안 나에게 수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 묻지 않고 열심히 숙제를 하더니 100점을 맞았다. 과외 중에 학생의 어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사과를 깎아 내었고, 나는 치아 교정 때문에 사과를 먹지 못하는 탓에 학생에게 양보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고등학교 선행 진도를 나갔다. 적당히 수다도 떨었다. 학생은 요즘 하는 게임을 말했고, 얼마나 재미있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축구를 했는데, 아깝게 졌다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제 중학교 3학년도 끝났다고 걱정스러운 마음도 표했다. 나는 다 괜찮을 거라고 말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수학을 공부하자고 약속했다.
과외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학생의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늘을 마지막으로 과외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갑작스런 통지에 놀라 이유를 물었다. 이제 학원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들어가기 힘든 학원인데 이번에 시험을 통과했다고 전했다. 공부하기 위해 가는 학원도 다시 입학시험이 있다는 것에 놀랍기도 했지만, 학생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당혹스러웠다. 나는 학생을 잡을 이유가 없어 알겠다고 답하고 연락을 마무리했다. 이제 나는 그 학생을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학생에게 수학과에 관심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문자를 남기려다가 체념했다.
아파트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아무도 없었다. 해는 이미 졌고 높은 가로등의 불빛이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고 있었다. 정류소로 한 사람이 걸어왔다. 중년의 남자였다. 추운 날씨에도 검은색 양복만을 단출하게 입었고 머리가 거의 벗겨져 있었다. 몸을 가누기 힘든지 양 옆으로 한 보씩 계속 움직였다. 술에 취한 듯했다. 그렇게 술에 취했으면 의자에 앉는 것이 편할 텐데도 계속 서 있었다. 곧 그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한참동안 화면을 보다가 귀에 가져다대었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무엇이라 말한 듯했지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의 너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아저씨가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꼬인 혀로 말을 이었다.
“예. 예. 최 집사입니다. 잘 지내시죠, 목사님? 예? 아. 예. 맞습니다. 힘들어서 술 한 잔 했습니다. 예? 예, 목사님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요. 예? 예. 지금 집에 들어가는 길이고요. 예. 예. 예. 알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고요, 예, 예. 목사님.”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붙였다. “제 기도 좀 많이 해주세요.” 아저씨는 무슨 말을 가만히 듣는 듯싶더니 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목사님. 예. 예.”
그는 전화를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정류소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금세 힘이 빠지더니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신고 있던 구두까지 벗어던지고 의자에 길게 누웠다. 곧 그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더니 무릎을 모아 옆으로 돌아누웠다. 나는 그와 어떤 접촉도 하고 싶지 않아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버스 하나가 도착했지만 아저씨는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차창 너머로 정류소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한동안 시험을 핑계로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고, 어머니의 부탁도 무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내게 왜 아버지에게 가지 않았는지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내 사정을 이해하는 듯했다.
나는 병원 앞에서 내려 아버지가 누워 있을 병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없었다. 병상이 비어 있었다. 나는 하얀 병상을 잠시 보고만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병실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듯했다. 나는 병실을 나와 입구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대고 행방을 물었다. 아버지는 오늘 퇴원을 한 것이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퇴원하셨다는데요. 알고 계세요?”
“그래. 오늘 퇴원했어.” 어머니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말을 붙였다. “병원이야?”
“아버지 어디 가셨어요?”
“또 혼자 어디 가서 술 먹고 있겠지.”
“이제 술 안 드신대요.”
“그 말만 이십 년째야.”
나는 인도 한 가운데 멈춰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나는 망설이다 물었다.
“괜찮으세요?”
답이 없었다.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아직 전화는 연결되어 있었다.
“어머니?” 나의 물음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일방통행을 나타내는 화살표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고, 이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위에서 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지나쳐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몸을 돌려 그 행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 아래 주택들과 역 주변을 눈에 담았다. 지금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가 병실에서 사라졌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든 아버지를 마주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입원 중에는 병원에 가지만 않으면 그를 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언덕을 오르다가 만날 수도 있었고, 편의점 앞에 있을 수도 있었다. 벌써 집에 있을 수도 있었고,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집에 찾아올 수도 있었다. 벌써 저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는 중일 수도 있었고,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와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었다. 그 가능성이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마음이 심란해 괜히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다시 언덕을 내려갔다. 역 주변은 사람들로 흥성거렸고, 밝은 빛이 가득한 간판으로 가득했다.
동네에 수진이 찾아온 날. 그때와 다를 것이 없는데, 또 다시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동네를 배회했더니 배가 고팠다. 눈에 익은 국밥집에 들어가 구석에 앉았다. 중년의 남자 넷이 모여 국밥을 먹고 있었다. 그 옆으로 남자 한 명이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식탁 위에는 초록색 소주 한 병이 올라 있었다. 나도 술을 마시고 싶었다. 홀로 술을 먹으려니 민망스러웠지만 나는 손을 들어 국밥과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국밥에 바로 밥을 말아 목에 술술 넘겼다. 소주도 한 잔씩 마셨다.
국밥은 국물까지 다 먹었고, 소주도 남기지 않았다. 가게를 나와 큰길로 향했다. 마침 길 끝에서 얼굴이 허옇고 머리가 두피에 붙은 두 여자가 걸어왔다. 그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행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날은 어둡고 얼굴은 하얀 탓에 그들의 존재가 유독 눈에 띠었다. 그들은 내게로 다가와 어김없이 질문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자르고 곧바로 자리를 옮겨 얘기를 하고 싶다고 답했다.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흔쾌히 나를 카페로 데리고 갔다. 역시 음료는 시키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얼그레이를 시켜 그들과 자리에 앉았다. 통통한 여자가 입을 뗐다. 예전에 수진과 함께 들었던 내용인 듯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나는 물었다. 나를 기억하는지. 그들은 모른다고 했다. 나는 수진과 이곳에 와서 이미 얘기를 다 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기억하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 같았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치아 교정 중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신기한 눈으로 나의 입을 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온갖 얘기를 꺼냈다. 강마른 여자의 십자가 목걸이를 가리키면서 그 형상의 뜻을 아는지 물었다. 그들은 나름 대답을 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정 일병과 함께 들었던 설교의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내뱉었다. 정 일병과 있었던 일, 그의 편지와 성경 말씀도 말했다. 이어서 김 병장 얘기도 했다. 그가 어떻게 죽은지도 말했다. 아버지 얘기도 했다. 그가 우리 가족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설명했다. 재준은 사라졌고, 인영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두 여자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얘기를 들었다. 나는 수학 얘기를 시작했다. 한 학기 동안 배운 개념과 정의, 증명한 정리들을 모조리 말했다. 내가 기하학과 해석학을 이해한 대로 전했다. 두 여자에게 수학 개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지만, 답이 없었다. 말없이 듣고만 있던 강마른 여자가 처음으로 입을 뗐다. 자기들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말고 더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통통한 여자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무엇이 미안한지 물었다. 그들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남겨두고 서둘러 카페를 나갔다. 나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카페 안이 너무 더워 밖으로 나왔다.
언덕을 오를수록 주변은 조용했다.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다가 편의점에 들려 짭조름한 아몬드와 캔 맥주 하나를 샀다. 집에 들어와 텅 빈 거실에 앉았다. TV를 켜고 맥주를 마셨다. 아몬드를 먹으려는데, 내가 치아 교정 중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안주 없이 캔 맥주만 홀짝였다. 리모콘으로 아무렇게나 채널을 돌렸다. 다큐멘터리 채널에서 손을 멈췄다.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는데, 물의 순환에 대한 다큐멘터리였다. 취기가 돌았지만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내용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빗방울 하나가 산으로 떨어졌다. 근엄한 목소리의 내레이션과 함께 물방울의 여정이 시작됐다. 산 위로 떨어진 물방울은 땅으로 스며들거나 냇물로 흘러들었다. 산 아래로 흐르고 흘러 지류에 닿고, 다시 강의 원줄기로 흘러들어갔다. 물방울 입장에서 화면을 실감나게 보여주었고, 장엄한 산과 강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물방울은 강을 타고 흘러 바다에 닿았다. 바다는 그 안에서도 위 아래로 끊임없이 순환했다. 다큐멘터리에서 따라가는 물방울은 결국 공기 중으로 증발했다. 오르고 올라 응축되어 구름을 형성했고 비가 되어 다시 처음의 산으로 떨어졌다. 물방울의 시야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산 위로 떨어지기 직전에 다큐멘터리는 끝이 났다. 인상 깊은 마지막이었다. 더 보지 않아도 물은 다시 순환할 것이었다. 나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TV를 껐다. 집은 조용했다. 나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