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은 밝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그 얼굴이 수진과 닮아서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수빈은 작은 냉장고 안을 살피며 맥주를 권했다. 나는 떨어진 와이어을 혀로 몰래 건드리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수빈은 캔맥주 하나를 들고 돌아와 침대 옆면에 등을 기댔다.
나는 물었다. “뭐하고 지냈어?”
“그냥 이것저것. 계속 고민하다가 복학 신청했어.”
“그리고 또?”
“또? 또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는데.”
“바빴어?”
“아니. 하나도. 어디 안 나가고 집에만 있었어. 공원에도 안 가고.”
“바쁜 줄 알았어. 계속 연락이 없어서.”
“내가 연락 안 했는데, 네가 집에 찾아오니까 기분이 엄청 좋아.” 수빈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괜찮아? 내가 없어도?”
“아직은 아니야.”
“그럼 왜 연락 안 했어?”
“너는?”
“나는……” 말을 골랐다. “나는 원래 그랬잖아.”
“수진이한테도 그랬어?”
수진의 이름을 듣자 내 목울대가 먼저 반응했다.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아?”
“네 입으로 듣고 싶어서.”
수빈의 요구는 정말 번거로웠다. 벌써 지친 기분이 들었다.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었지만, 너한테 하는 것보다는 자주 연락했어. 사실 그다지 차이는 없어. 그냥 만날 때가 되면 약속을 잡기 위한 연락을 했을 뿐이야. 수진이도 그랬고.”
수빈은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나는 후회돼.”
“후회?”
“처음부터 숨기지 말고 너한테 수빈이라고 말할걸 그랬어. 물론 나도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너를 처음 만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면 지금이랑 다를까?”
“네가 나한테 자주 연락할 수도 있지. 우리가 서로를 처음부터 알아보았으면, 우리 관계가 조금은 달랐을 거야.”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계속 좋아했을 수도 있잖아. 나는 이제 확실히 알았어. 나는 네가 좋아.”
“나도 알아.”
“너는?”
“나는 그런 생각 안 해봤어.”
“수진이 아니라 나를 먼저 알게 되었다면, 수진이를 사랑했던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수빈의 질문은 하나같이 터무니없었다.
“수진이를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할 수? 네가 물어보는 말들이 다 이상해. 지난번에 만났을 때는 말도 멋있게 했으면서, 오늘은 왜 그래.”
“몰라. 나도.”
수빈은 손가락 끝을 매만졌다. 나는 자세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오른쪽 어금니의 와이어를 혀로 눌렀다. 그녀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연락하지 않는 동안 너도 나름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 너에게 시간을 주려고 했거든. 저번에 어린 아이에 대해 이야기한 후에, 너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
“놀이동산에 갔어.”
“놀이동산?” 수빈은 눈을 양 옆으로 굴리더니 말을 붙였다. “아, 놀이동산. 혼자?”
“응. 나 혼자.”
“어땠어?”
나는 어제의 일을 떠올렸다. 수많은 아이들 속에 있었고, 온갖 놀이기구를 탔다. 빨간 풍선과 롤러코스터를 기억했다. 그 모든 일을 수빈에게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딘가에 내가 말해야 하는 자명한 문장이 쓰여 있을 것만 같았다. 벽과 침대, 가구와 탁자, 형광등과 천정,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하나씩 살펴본 후에야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겨우 목소리를 냈다.
“이제 너를 찾지 않을 거야.”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초점 없이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내 뒤를 보는가 하면, 탁자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우리의 숨소리만 들렸다. 나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고, 뒤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알았어.” 잠시 말을 뜸들였다. “이제 너는 내가 필요하지 않는 거지?”
“아니. 나는 네가 필요해.” 우리는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았다. 같은 곳을 응시했다.
그녀가 풀이 죽은 듯이 말했다. “그래. 잘 가.”
나는 입술을 양 옆으로 늘려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수야.”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옅게 흔들렸다. “마지막으로 나를 안아 줘. 나를 한 번도 안아준 적 없잖아.”
나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미안해.”
혼자 건물을 나왔다. 높은 오피스텔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어린이대공원 앞까지 걸어갔지만, 입구를 통해 그 안을 살펴보기만 했다. 그대로 지하철 출구로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와 방의 문을 걸어 잠그고 계속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