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페 건물 1층에 있는 카페에는 자리가 없어 우리는 길을 따라 걸었다. 볕은 내렸지만 날은 으슬으슬 추웠다. 옷이 얇은 인영이 걱정되었다. 춥지 않는지 물었는데, 인영은 괜찮다고 답하더니 내게 가까이 붙었다. 가볍게 팔을 둘렀다. 나의 팔이 인영의 몸에 닿았다. 나는 어색해서 인영이 들고 있는 꽃다발을 대신 들어 팔을 고정시켰다. 반대쪽 손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우리는 가끔 손님이 적은 카페 앞을 지났지만, 인영은 팔짱을 낀 채로 걷기만 했다.
우리는 지하철 한 정거장의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가로수 곁을 지날 때에 인영은 팔짱을 풀더니 내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등에 인영의 손이 닿았다. 몹시 차가웠다. 나는 인영의 손을 잡아주었다. 부드러웠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으로 걸어갔다. 적어도 나는 처음 걷는 곳이었다. 세찬 바람이 한 차례 불더니, 코 위에 빗방울이 떨어진 듯 차가운 촉감이 들었다. 하늘이 점차 우중충해졌다.
인영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말했다. “오늘 비 온다고 했어.”
“큰일이네. 우산 없는데.”
“그냥 우리 집에 가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집까지 걸어가도 되지? 금방이야.”
“물론.”
우리는 지나온 길로 돌아가다가 처음 보는 길로 접어들었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인영은 주저하지 않았다. 조용한 주택가를 지나 골목을 몇 번 꺾어 들어가자 다시 큰 길이 나타났다. 우리는 길을 건너 마주 편 골목으로 들어갔다. 인영의 집으로 들어가는 초입이었다. 익숙한 편의점이 나타났다. 인영은 내게 캔 맥주 두 개만 사자고 했다. 우리는 손을 잡고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샀다. 문을 열고 나오자 벌써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인영은 오늘 오후의 강수 확률이 높다고 했다. 내게 어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집은 지난 번 방문 때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책상 위에 전공 교재가 없었다. 나는 인영에게 책의 행방을 물었고, 인영은 모두 팔았다고 답했다. 그리고는 옷가지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인영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옷장 서랍을 열어 옷을 뒤적였다. 옷을 꺼내 내게 건넸다. 예전에 남동생이 왔다가 두고 갔다면서 아마 키가 비슷해서 맞을 거라고 했다. 나는 인영이 건네준 옷을 받아 화장실에 들어갔다. 옷은 딱 맞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자 인영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작은 탁자를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캔 맥주 두 개와 짭조름한 과자, 노트북을 차례로 가져왔다. 인영은 영화를 볼 생각이라며 불을 껐다. 방은 어둑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등 뒤에 긴 베개를 대고 침대 위에 앉았다.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였다.
우리는 맥주를 홀짝이며 영화를 봤다. 주인공이 청장년에 다다를 쯤부터 인영은 상체를 수시로 움직이더니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내 손을 잡았다. 그녀의 호흡이 느껴졌다. 나의 몸으로 전해졌다. 인영이 속삭이듯 말했다.
“재미있어?”
“그냥 그래. 너는?”
“나도.” 인영이 나의 어깨에 머리를 부비더니 말을 이었다. “원작이 단편소설이라고 하던데. 소설과 영화가 얼마나 비슷할지는 모르겠어.”
“요즘도 책 많이 읽어?”
“아니, 요즘은 안 읽어. 그럴 정신이 없어. 너는?”
“나도, 뭐……”
“일 학년 때 생각난다. 우리 구석에 앉아서 책도 읽고 공부도 했었잖아. 그때는 좀 어색했는데.” 나는 답하지 않았다. “같이 책 얘기도 하고 수다도 떨고, 그런 시간이 지금 생각해도 좋았어.”
인영은 내게서 상체를 일으키고 영화를 정지시켰다. 영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 빗소리와 가까운 숨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너 군대 가기 전에 있잖아, 그때 너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어?”
“너를 좋아했을 거야. 그런데 사정이 좀 있었어. 가뜩이나 나는 군대를 가야 했잖아.”
“나는 그때 네가 사귀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는 노트북의 정지된 화면을 보았다.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배우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없었어, 나는.”
“정말?”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던 거야.”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나는 네가 좋아. 너는?”
나는 맞잡은 손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도.” 나는 인영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도 분명 너를 좋아해.”
인영은 내 품에 안겼다. “너랑 같이 있으면 의지가 돼. 정말로.”
“나는 그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야.”
“나보다는 강한 사람이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제 알아. 나는 유약해. 아주 작은 일에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주. 예전부터 그랬어.”
“아니야. 그래서 너는 강한 거야.”
“어째서?”
“강하다는 건, 자기 자신을 안다는 말이니까. 적어도 너는 자신을 속이지 않잖아. 다른 사람에게 거짓으로 연기하지 않고. 겉과 속이 같아.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야.”
“잘 모르겠어.”
“나는 내면도 복잡하면서, 그 속에서 중요한 것을 알아내려고 해. 뭘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매번 시도해. 그러니까 내면과 외면이 같아지려고 노력한다는 거야. 하지만 그럴 수 없어.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환경은 바뀌지 않으니까. 때로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를 바꿔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돼. 밖에서부터 안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시작해서 밖으로 나가려고 해. 그래서 매번 실패해. 좌절하고 마는 거야. 좀 고쳐보려고 하는데 습관이 됐나봐, 나도 모르게 계속 시도하고 있어. 그럼 또 실패할 게 뻔한데. 그럼 또 나는 무너질 텐데.” 나는 인영에게 그 시도가 강한 것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인영이 바로 말을 이었다. “미안해. 또 심각해졌다.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안 할래. 오늘은 그러고 싶어.”
“그래, 너 편한 대로.”
인영은 고개를 들어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쳤다. 인영의 얼굴이 천천히 내게 올라왔다. 나도 다가갔다. 우리는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웠다. 인영은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교정기 때문에 불편하지?”
인영은 엷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조금.”
“미안해.”
“뭐가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작은 탁자를 침대 아래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침대 위에 누워 다시 입을 맞추었다. 정성들여 서로의 것을 확인했다. 나의 것은 거침없이 단단해졌고, 나의 모든 감각이 인영에게 집중했다. 인영의 숨결과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영은 나의 단단한 것을 가볍게 잡았다. 나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마주했다. 입을 맞출 때처럼 부드러운 촉감이 일었다. 온몸으로 퍼졌다. 나의 아래에서 인영이 머물렀다. 인영은 나의 것을 부드럽게 다루었다. 반복되는 감각에 정신이 혼미했다. 나는 눈을 떴다. 창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고, 수시로 창을 두드렸다. 나는 더욱 단단해졌다. 창문에 맺힌 물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다른 물방울과 합쳐졌다. 몸의 크기를 키웠다. 아래로 흘러 사라졌다. 나는 금방이라도 쏟아낼 것 같았다. 빗소리가 들렸다. 비의 소리. 수진의 얼굴. 감각 위로 아주 또렷하게 스쳐 지나갔다. 수진의 감각이었다.
허리를 뒤로 빼며 말을 내뱉었다. “잠깐만.”
인영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입을 닦고 놀란 눈으로 말했다. “아팠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인영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나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빗소리가 멀거니 들렸다.
“미안해. 나는 아직 안 될 것 같아. 이만 갈게.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인영은 자세를 고쳐 앉을 뿐 답이 없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상의와 하의를 갈아입고 코트를 입었다. 침대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인영에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그…….”
인영은 나의 말을 끊고 답했다. “그냥 가.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녀는 침대 한 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 밖에는 가늘고 성긴 비가 조용히 내리는 중이었다. 편의점으로 뛰어 들어가 검은색 우산을 하나 샀다. 곧장 역으로 걸어갔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