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동안 빗속을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코트를 벗다가 주머니에서 검은색 상자를 발견했다. 당혹스러웠다. 엉겁결에 가지고 온 검은색 상자를 어떻게 인영에게 돌려주면 좋을지 고민했지만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턱대고 인영을 보러 갈 수는 없었다. 연락하기도 어려웠고, 우연이라도 학교에서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금반지가 있었다. 나는 놀라 금반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어지러웠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급하게 뚜껑을 눌러 닫으며 말했다. “제발 노크 좀 하세요.”
“노크는 무슨.” 어머니는 개지 않은 옷가지를 방 가운데에 던졌다. 나의 옷들이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려다가 발을 멈췄다. “그거 뭐야?”
나는 검은색 상자를 손등으로 감추듯 감싸 잡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 엄마도 보여줘.”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아무것도 아닌데 왜 숨겨?”
“숨긴 거 아니에요.”
“숨긴 게 아니면 보여 달라니까?”
“그냥 좀 나가세요.”
어머니는 나를 노려보았다. “숨기니까 더 안 되겠다. 그거 이리 내놔.”
“싫어요.”
“내놓으래도!”
어머니 특유의 맥락 없이 정색하는 표정과 억척스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어머니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싫다고요! 왜 다 어머니 마음대로에요? 제가 싫으면 싫은 거죠.”
“엄마한테 소리를 쳐? 어!” 어머니는 내게 눈을 부라렸다. 눈알이 금세 벌겋게 올랐다. 무엇이 어머니를 이토록 화나게 만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주눅이 들었지만 대항했다. “지금 엄마도 소리치잖아요!”
“어디서 큰 소리야? 어!”
어머니는 나처럼 억지로 분노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화가 솟구치고 있었다. 그 분노를 스스로도 잠재우지 못하고 이목구비에 그대로 드러냈다. 어머니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고, 호흡은 거칠게 가빠졌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거 이래 내.”
“싫어요.”
어머니는 화를 주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머니의 광대와 뺨이 위험하게 실룩였다. 갑자기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의자에 앉은 내 위로 올라탔다. 팔로 내 어깨를 밀치고 눌렀다. 손에 있는 검은색 상자를 뺏으려고 했다. 나는 어머니의 몸의 짓눌려 팔만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상자를 꼭 잡아 쥐었다. 의자에 포박된 채로 어머니가 닿지 못하는 곳으로 손을 옮기고 옮겼다.
나는 절박하게 외쳤다. “그만 하세요! 제발 그만!”
어머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찍고 팔꿈치로 턱과 어깨를 내리눌렀다. 고통스러웠다. 어머니는 나의 팔을 끌어와 손가락을 하나씩 폈다.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뒤로 꺾었다.
나는 애원하듯 외칠 뿐이었다. “그만 하세요. 이제!”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금세 손에서 작은 상자가 떨어졌다. 어머니는 내게서 물러났다. 나의 하체와 상체에서 어머니의 육중한 몸무게가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제압된 듯 의자에 앉아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한 기분이었다. 수치스러웠다. 어머니의 손에는 검은색 상자가 있었다. 그는 씩씩대며 뚜껑을 열었다. 표정이 짐짓 환하게 바뀌었다. 은근한 육성을 냈다.
“뭐야. 이거 금반지잖아.”
“제 거 아니에요. 돌려줘야 돼요.”
어머니는 금반지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이리저리 돌려 관찰했다. “그런 게 어딨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머니는 다섯 손가락에 반지를 모두 대보더니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금반지를 힘겹게 끼워 넣었다.
“엄마한테 딱 맞네?”
“제 거 아니라니까요. 친구 거예요.”
“친구가 준 거겠지. 그치?”
“돌려줘야 돼요.”
어머니는 손가락을 길게 펴서 자신의 손과 반지가 얼마나 어울리는지 새침한 얼굴로 확인했다. “안 돌려줘도 되잖아. 돌려줘야 했다면, 네가 이런 식으로 순순히 뺏기지는 않겠지. 아빠한테 했던 것처럼 엄마한테도 힘을 썼을 거 아니야, 안 그래? 내가 아들도 모를까봐?”
할 말이 없었다. 기운이 빠졌다. 화가 나지도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나를 탓했다. 왜 화가 나지 않을까. 시답지 않은 이유로도 과도하게 화를 부릴 수 있는 어머니처럼 나는 왜 분노하지 못할까.
“아들. 이런 거 받았으면 엄마한테 줘야지.”
“제가 왜요?”
“당연한 거잖아. 엄마한테 주는 게.” 어머니는 나를 응시했다. “다른 집 자식들은 뭐 받아오면 바로바로 제 엄마한테 가지고 온다는데, 너는 어떻게 악착같이 숨기려고 하니? 너 그러면 진짜 안 되는 거야. 엄마 좀 서운해.” 무언가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가 목젖쯤에서 턱 막힌 듯했다. “너는 어떻게 너밖에 몰라? 네가 이걸 어디다 쓰게? 쓸데도 없으면서 엄마한테는 싹 비밀로 하고. 아니, 네가 쓸데가 있다 해도 엄마한테 먼저 물어봐야지. 이런 걸 받아왔는데, 엄마 드릴까요? 하고. 그게 자식인 거야. 다른 자식들은 다 제 부모 위한다고 뭐라도 가지고 온다는데, 너는 진짜. 누굴 닮아서 이러는지…….” 어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당연히 엄마 거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어머니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반지 빼세요.”
“얘가 끝까지 이러네?”
“제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거짓말이잖아.”
“돌려줘야 되니까 이제 그만 주세요.”
어머니는 반지를 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돌려줘야 되는 거면 네가 알아서 해.”
말이 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확실했다. 힘을 쓰고 싶었다. 진심으로 힘을 부리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온몸에 힘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잃어가는 듯 했다. 속은 따갑고 쓰리게 올랐지만, 그것이 힘의 동기가 되지는 못했다. 완력보다 눈물이 솟구칠 것 같았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도 어머니처럼 힘으로 짓누르고 깔아뭉개서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의 몸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영수야, 고마워. 역시 아들 밖에 없어.”
어머니는 문까지 깔끔하게 닫으며 방을 나갔다. 나는 붙잡지도 부르지도 못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어떤 것으로도 어머니를, 상황을, 힘을 바꾸지 못했다. 어지러울 정도로 뜨겁게 오르던 몸속의 열기가 단숨에 가셨다. 나의 속이 완전히 비어 있는 것 같았다. 공허했다.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천천히 감았다. 순간 따끔한 감각이 온몸에 올라 퍼졌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사라진 도서관에서 가져온 책 3권을 가방에 담아 집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