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의 교점 # 90

by 청화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었다. 다시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수진의 생일을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집 안에는 개인적인 물건들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를 보나 하얬다. 그곳에, 텅 빈 방안에 그녀가 홀로 서 있었다. 옷을 모두 벗은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수진인지 수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숨이 멎을 듯 벅차올랐다. 눈물이 날 것도 같았고, 화가 날 것도 같았다.


“너는 누구지?”


그녀가 은미한 미소를 지었다.


“영수야.”


내게 다가왔다. 하얀 손으로 나의 뺨과 귀와 턱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웠다. 그녀의 촉감이었다. 뜨거운 것이 눈가로 솟구쳤다. 눈물이 흘렀다. 흘러나오는 눈물에 가려 그녀의 육체가 자꾸만 번졌다. 눈물을 닦아내고 닦아내어 그녀를 응시했다. 유두와 가슴, 쇄골과 어깨, 배꼽과 배를 눈에 담았다.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수진이었다. 분명 그랬다. 환한 웃음과 장난기 어린 눈빛, 나를 쓰다듬는 손길까지 틀림없이 수진이었다. 그녀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수진아.”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턱에서 봉긋한 가슴 위로 떨어졌다. 분명 눈물이 계속 흘렀지만, 그녀의 표정은 안간힘을 써서 눈물을 막으려는 것처럼 절박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 걸음도 다가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세상에 어떤 변화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 작은 변화가 다시 세상을 되돌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안아 줄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차마 내뱉지 못한 나의 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 천천히 다가가 나체의 그녀를 안았다. 그녀의 하얀 팔이 나를 감쌌다. 서서히 목덜미로 올라 내게 매달렸다. 나의 얼굴을 끌어내려 입술을 맞대었다. 서로의 입술 위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자연스레 포개었다.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녀는 나의 옷을 하나씩 벗겼다. 나도 그녀처럼 나체가 되었다. 그녀는 나를 하얀 침대로 이끌었다. 나를 눕혔고, 하얀 천으로 눈을 가렸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모든 피부를 탐색하듯 몸을 움직였다. 모든 살갗에 입을 맞추려는 것처럼 그녀의 감각은 얼굴과 귀, 입술과 목으로 이어졌다. 나의 모든 곳에 입술을 갖다 댔다. 혀로 핥고 입으로 물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늘어뜨려진 긴 머리카락이 나의 온몸을 훑고 지났다. 마침내 그녀는 나의 발끝에 이르렀다. 나의 것은 이미 주체할 수 없이 단단해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의 정강이. 무릎. 허벅지를 타고 스치며 올라왔다. 그녀는 나의 것을 입으로 건드렸다. 눈이 가리어진 탓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목격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촉감은 생생했다. 그녀의 입술로 나는 더욱 단단해졌다. 곧 그녀는 자세를 바로 세우는 듯했다. 나의 위로 올라왔다. 온몸이 따뜻했다. 우리는 서로의 빈자리를 채웠다. 우리 사이에 어떤 빈틈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이 밀착했다. 힘껏 서로를 감쌌다. 또렷한 감각이 일었다. 기억 속에 각인된 감각이었다. 수진이었다. 나의 단단한 것이 그녀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아닐지 어느 때보다 염려되었지만, 그녀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것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우리는 서로의 것을 더욱 단단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만들었다. 나는 사정했고, 나의 것도 그녀의 것을 따라 단단함을 잃어갔다. 그녀의 손길이 머리에 닿았다. 묶인 천을 풀었다. 눈이 부셨다. 천천히 시야를 회복하고 그녀의 온몸을 빠짐없이 훑어보았다. 우리는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물었다. “왜 나를 떠났어?”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았어.”


우리는 말을 잇지 않았다. 서로의 몸을 보듬었다. 피로가 엄습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졸음을 견뎌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안은 채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아래턱에 입을 맞추었다.


“영수야, 이제 자.”


“너와 더 함께 있고 싶어.”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을 수 있어.”


나는 얼굴을 기울여 그녀를 찬찬히 응시했다. 그녀도 깊은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나는 의지와 다르게 그녀 옆에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거부할 수 없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잠결에, 아니면 꿈결에 나의 오랜 질문을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얼마나 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영수가 괴로운 시간은 끝났어.”


“도대체 얼마나 더……”


수진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상처가 아물었어.”


나는 몽롱한 의식에 빠져 답하지 못했다.

잠에서 깼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로 발가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걸터앉았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맨다리가 눈에 들었다. 무릎과 사타구니에 상처가 없었다. 손등과 팔꿈치, 어깨에도 없었다. 욕실로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몸을 돌려가며 눈이 닿지 않는 부위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깨끗했다. 거울 속의 내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불현 듯 깊숙한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알알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옹골찬 압력이 피부 곳곳에서 느껴졌다. 그 감각들과 함께 지금까지 나를 붙든 오랜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제 나의 차례였다. 내게도 직접 확인할 때가 온 것이었다. 유약하기만 했던 내가 비로소.


나는 옷을 입고 곧장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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