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고 이거 입어.”
욕실로 수진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나는 수진이 건네준 옷을 들었다. 작아 보이기는 했지만, 품이 넓은 잠옷바지와 후드 티였다. 나는 몸과 머리를 대충 씻고 수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옷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지만, 속옷을 입지 못한 탓에 까끌한 촉감이 성기에 닿아 불편했다. 나는 옷을 좌우로 돌리며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내가 욕실을 나오자마자 수진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바닥에 앉았다. 작은 방에 홀로 앉아 수진이 씻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그녀가 씻는 소리에서 주의를 돌리기 위해 주변에 사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집은 원룸이었다. 커다란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놓였고, 대부분의 가구들은 옵션인 듯 각자의 자리에 딱 맞게 자리했다. 작은 탁자 위에는 다이어리처럼 보이는 두툼한 공책이 있었다. 부지런하게 일기도 쓰는 모양이었다. 닫힌 창으로는 빗물의 그림자가 유유히 흘렀다. 문득문득 빗방울이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에서 드라이기 소리가 넘어왔고, 곧 욕실 문이 열렸다. 습기를 머금은 따뜻한 공기가 방으로 들었다. 나는 수진이 욕실에서 나왔다는 걸 알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안 말려도 돼?”
“응, 괜찮아.”
“미안한데 집에 먹을 게 없어.”
수진은 물을 끓이더니 금세 따뜻한 얼그레이 차를 내었다. 그녀는 침대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얼그레이 차를 후후 불어 마시고 잔을 손으로 슬며시 감쌌다. 수진 하얀 손목이 드러났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서로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공간에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을 때보다, 실제로 그녀를 눈앞에 보고 있을 때가 더 마음이 편했다. 말을 억지로 잇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의 부족한 말주변을 탓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분명 수진은 침묵을 허용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정적 속에서 우리의 숨소리만이 반복되다가, 느닷없이 바깥에서 천둥이 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수진의 모습은 낯설었다.
“영수야.” 수진의 시선이 내게로 돌아왔다. “이런 날에는 세상이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세상이?”
“응. 세상이, 지구가.”
“누구한테?”
“아마 나한테?”
“수진이 너한테? 왜 그렇게 생각해?”
“그냥 그런 기분이라는 거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가끔은 정말 이 세상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인간 같아. 그래서 내가 아무리 홀로 있고 싶어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분일 때가 있어.” 나는 괜히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보더니 수진은 은미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가이아 이론이라고 들어봤어?”
“들어본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어.”
“얘기 해줘도 돼?”
“물론. 재미있을 것 같아.”
“음……. 우선 가이아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의 대지의 여신의 이름이거든. 가이아 이론은, 그러니까 지구가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거야. 지구에 있는 모든 개체가 지구를 이루는 하나의 세포이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론이야. 공부를 하면 할수록 신기한 게, 생각보다 인간은 지구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거야. 심해에 대해서도 모르고 땅에 대해서도 잘 몰라. 아주 옛날에 누군가가 땅을 일 킬로미터쯤 팠다는데, 그게 최대 깊이래. 신기하지 않아? 우리는 지구에서 태어나서 아마 지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살아갈 텐데, 사실은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야. 고작 우리는 대지의 여신님의 피부 정도만 알고 있다고 해야 되나?” 수진은 재미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손등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혹시 그것 때문에 전공을 선택한 건 아니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좀 이상한가?”
“아니, 많이 이상해.”
우리는 얼그레이 차를 마셨다. 그 사이 바깥에서 천둥이 한 차례 크게 울렸다. 수진은 잔을 내려놓더니 입을 뗐다. 여린 목소리였다.
“비가 내리면 그녀가 우는 것 같고, 천둥 번개가 치면 그녀가 화를 내는 것 같아. 뭔가를 알려주려는 것만 같아. 뭔가 잘못 되었다고 혼내는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죄를 많이 지은 거 아니야?”
“맞아. 그런 가봐. 그래서 그런 가봐.” 수진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장난이야.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 너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가장 좋은 사람이야. 이거 그냥 말하는 거 아니야. 진심이야.”
“진심인 거 알아. 네가 그런 말을 그냥 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아. 고마워. 그 말을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할 거야.” 수진은 침대 위에 이불을 끌어와 다리를 덮고는 입을 뗐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나는 수진에게 눈짓으로 답했다.
“너는 나 어때? 나를 좋아하는지 묻는 거야.”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수진이 좋았다. 좋지 않으면 그녀를 다시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동안 그녀를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질문하는 그녀의 눈빛은 사뭇 무거운 듯했다. 내가 말을 고르는 중에 수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표정을 풀었다.
“미안. 내가 너무 심각했지? 그냥 물어보는 거야. 나한테 끌리는 어떤 부분이 있는지.”
“나는 너에게 끌려. 그건 확실해.”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너는?”
“지난번에 이미 말했잖아, 너를 좋아하고 싶다고.”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잡히지 않았다. “너랑 헤어지고 나서 계속 네 생각이 났어. 정확히 말하면 네 생각이라기보다, 어린 영수가 자꾸 떠올랐어.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너의 이야기만으로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아이 같아. 터져 버린 빨간 풍선과 막대기만 잡고 있는 아이 말이야. 놀란 눈으로 어둑어둑한 벽 앞에 서 있는 어린 아이. 그 영수가 계속 기억이 났어.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어. 혼자서 울기도 했어, 너무 가엾고 불쌍해서.” 수진의 눈망울이 반짝였다.
“미안해. 네 앞에서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실 내가 좀 별로였지?”
“아니 절대. 나는 네가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누구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는 거, 그거 절대로 쉬운 일 아니야. 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야.”
강한 사람. 나는 수진의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수진의 갑작스런 질문에 나는 그녀를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나의 시선을 거뜬히 응대하다가 다시 입을 뗐다. “세상에 있는 건 뭐든지 서로를 끌어당겨. 우리도 서로 분명 끌리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보다 더, 그렇지? 그런데 그 상태는 분명 위험한 거야. 서로 잡아당기기만 하다가는 결국에는 부딪힐 테니까. 결국 상처를 주게 되겠지. 아니, 어쩌면 운 좋게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성이 될지도 몰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할 수도 있어. 아주 희박한 일이지만 말이야. 우리가 그런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런 사이가 되기를 바라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어. 내가 지구라면 네가 달. 너의 모습 중에 일부밖에 볼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그런 사이라면 좋겠어. 너는 어떻게 생각해?”
“글쎄. 그게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그게 정말 좋은 사이인지도 나는 잘 모르겠어. 서로 맴돌기만 하고 만나지는 못하잖아.”
“그럼 너는 서로에게 상처를 줘도 된다고 생각해?”
“아니, 전혀. 나는 그런 거 정말 싫어해.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상처 받고 싶지도 않고.”
“그래. 그러면 됐어.”
“우리의 걱정과는 상관없이, 어쩌면 우리는 가까워지기만 할 수 있을 뿐 만나지는 못할지도 몰라.”
“나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어. 상처받는 것보다는 나아.”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았다. 어느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네 생각을 많이 했어.”
“나를 어떻게 기억했어?”
“내 뺨을 어루만진 손, 내가 눈물을 흘렸을 때.”
우리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이 들렸다.
수진이 속삭이듯 말했다. “이리 와. 내 옆으로.”
수진은 침대를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옆자리로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앉았다. 수진은 내게 몸을 기댔고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손을 들어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부드러웠다.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몸을 녹이듯 느긋하게 체온을 담아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나 또한 그러했다.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그만큼 나는 그녀의 무게를 그대로 느꼈다.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 나의 몸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고, 우리는 서로의 몸에 기대어 몸을 눕혔다. 우리는 떨어지지 않고 입을 맞추었다. 바지의 재질은 몹시 거칠었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방해가 되는 것을 하나씩 제거했고, 결국 우리의 피부가 맞닿았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서 나의 얼굴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마에서부터, 눈과 코, 뺨과 귀, 턱과 목으로 내려왔다. 어깨와 가슴, 팔뚝과 손, 배와 골반에 입을 맞추며 아래로 내려갔다. 나의 모든 피부에 입을 맞추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발끝과 발목으로 내려갔다가 정강이를 타고 무릎으로 오르며 입술을 댔다. 사타구니를 지나 올라왔다. 나의 모든 피부가 그녀의 입술 아래 세심하게 확인됐다. 그녀 앞에서 나의 단단한 것만이 남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대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나의 허리춤에 떨어져 간지럽게 흔들렸다. 그녀는 어떤 신체의 부위보다 정성스레 입을 맞추었다. 나는 그녀의 입술 안에 있었다. 나는 더욱 단단해졌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말없이 천정을 보며 빗소리를 들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있었다. 수진의 다리가 나의 다리 위에 편하게 올랐고, 수진의 팔은 나의 상체를 감쌌다. 그녀는 나의 어깨춤에 머리를 기댔다.
수진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왜 연락 안했어?”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게 편하기도 했고, 뭔가 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어. 너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아니야. 아까도 말했지만, 너를 많이 생각했어.”
“나도 그래. 너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너를 충분히 만나고 있었어. 어린 너를 생각했고, 그 후에 진짜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거야.”
수진은 나의 품으로 더욱 밀고 들어왔다. 그녀의 맨가슴이 나의 몸통에 닿았다. 숨을 쉴 때마다 상체가 천천히 오르고 내렸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수진은 나의 어깨와 팔에서 빠져나가더니 팔을 턱에 개고 엎드려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가 내 생일이었어.”
“생일? 왜 말 안했어?”
“그냥.”
“생일에 뭐 했는데?”
“아무것도.”
“그래도 괜찮아?”
수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답했다. “있잖아…….” 나는 수진과 눈을 마주쳤다. 편안하고 깊은 눈빛이었다. “있잖아 우리, 다음에 놀이동산 안 갈래?”
“놀이동산?”
“응. 같이 가자. 같이 가고 싶어. 장마니까, 밖에서 노는 것보다는 더 좋을 거야.” 나는 망설였다. “혹시 가기 싫어? 가기 싫으면 억지로 안 가도 돼.”
“그런 건 아니야. 대신 놀이기구는 타지 말자.”
“왜?”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놀이동산에 가는 이유가 없잖아.”
“그렇기는 한데…….”
“그럼 이렇게 해. 딱 하나만 꼭 같이 타자.”
“뭐 탈 건데?”
“당연히 롤러코스터지.”
“한 번도 안 타봤는데.”
“그럼 이번에 꼭 타야겠다. 나한테 생일 선물 준다고 생각해.”
나는 잠시 고민했다. “알았어. 그거 하나.”
“약속이다?”
“약속할게.”
수진은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눕더니 몸을 밀착했다. 수진은 그 후로 말이 없었다. 곧 수진의 규칙적인 호흡이 들렸다. 잠든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슬쩍 수진을 보았다. 정수리가 보였다. 나는 뜬 눈으로 천정을 바라보며 멍하니 한참을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수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빼내려는데, 수진이 움직였다. 졸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어디 가?”
“돌아가려고.”
“벌써?”
나는 수진이 준 후드 티를 입으며 말했다. “이거 입고 갈게.”
“그 옷을? 괜찮아?” 나는 말없이 후줄근한 잠옷 바지도 마저 입었다. 수진은 창문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아직 밖에 비 오나?”
“지금은 그친 것 같아.”
“으음.” 수진은 이불을 끌어 몸에 두르고 말했다. “우리 언제 또 봐?”
“다음 주쯤에.” 나는 수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입을 뗐다. “연락할게.”
수진은 잠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 속으로 쓰러졌다. 금세 다시 잠든 모양인지 미동도 없었다. 나는 수진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오피스텔을 나왔다. 하늘 위에 먹구름이 넘실댔다. 언제라도 비를 뿌릴 것처럼 흘렀다. 오피스텔 유리 현관문에 내 모습이 비췄다. 수진의 옷을 입은 나를 눈에 담다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