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재준과 파전동동에서 만나기로 했다. 학교로 가는 길 내내 인영의 생각이 났고, 몇 번이나 연락을 하려다가 포기했다. 인영은 도서관에서 수학을 공부하고 있을 것이었고, 그 시간을 괜히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주점 앞에 이르자 재준이 보였다. 재준은 아쉬운 듯 말했다.
“오늘 파전동동 쉬는 날이래.”
지하로 내려가는 문은 닫혀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쉰다는 안내가 하얀 종이 위에 수기로 적혀 있었다. 재준과 나는 그 바로 옆에 있는 가벼운 분위기에 주점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나란히 앉아 메뉴판을 확인했다. 생맥주를 주로 판매했고, 안주로는 감자튀김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스를 두 가지 선택할 수 있었다. 재준은 칠리소스를 바로 골랐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니언 소스를 선택했다. 직원을 불러 생맥주 두 잔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재준은 그 와중에 휴대폰을 연신 두드렸다. 무슨 일이 있겠거니 싶어 말을 걸지 않았다. 금세 생맥주 두 잔이 먼저 나왔다. 그제야 재준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맥주잔을 들었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맥주를 마셨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웠다. 재준은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강의 시간처럼 손가락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재준이 어색하게 눈을 들었다. 활기를 잃고 지쳐 보였다.
“미안. 조금만 봐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재준은 입을 앙다물고 고민하는 듯싶었다.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재준은 휴대폰을 귀에 댄 채로 씩 웃었다. 불길한 미소였다. 곧 전화가 연결됐는지 재준은 지현의 이름을 부르며 나를 힐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대뜸 내게 휴대폰을 건넸다. 나는 손사래를 쳤지만, 재준은 서글서글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입속말로 간절하게 부탁했다. 나는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지현은 나의 목소리를 듣더니 인사를 건넸다. 나도 짧은 인사를 했다. 그녀는 나의 이름과 재준과 함께 있는 장소를 물으며, 또 다른 사람이 있는지 추궁했다. 아무도 없다고 했다. 재준과 나뿐이라고 답했다. 지현은 다시 재준을 바꿔달라고 했다. 재준은 달달한 사랑 표현을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재준이 말했다. “고맙다.”
“미리 말을 해줘야지. 갑자기 이러면 어떡해.”
“미안, 미안. 다음에는 미리 말할게.” 재준은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나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정말 이래도 괜찮아?”
“너에 대해서는 좀 얘기를 해놨거든. 연락을 아예 안 하는 건 당연히 지현이가 기분이 좋지 않을 텐데.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
재준과 공범이 되는 기분이어서 찜찜했다. “그냥 연락해도 돼. 나는 괜찮아.”
“아니야. 잠깐의 자유시간이야. 지현이랑 나도 그런 시간이 필요해.”
“너 괜찮은 거야?”
“당연히 괜찮고말고. 그나저나 너는 어땠어? 데이트는?” 나는 수진을 생각했고, 답 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왜 그래 반응이? 별로였어?”
“그런 게 아니라. 사실 뭔가 좀 이상해서. 나는 미팅에 나가기도 싫어했잖아, 결국 네 부탁 때문에 나간 거고. 사실 아무 기대가 없었거든, 정말로. 근데 너무 좋은 사람을 만난 것 같아. 좋은 사람이라기보다 잘 맞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그럼 잘 된 거 아니야?”
“좀 얼떨떨해서. 이럴 수가 있나 하고……. 뭔가 좀 이상해.”
“이상할 거 없어. 우리 영수가 사랑에 빠졌구나.” 재준은 나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랑니도 뽑지 않은 재준이 사랑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잠자코 있었다. “그럼 이제 사귀는 거야?”
“글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런 것 같아.”
“그래 대충 뭔지 알겠다. 서로 자연스럽게 알아가는 거구나. 서로 마음에 드는 것도 같고.”
“아마도.”
“그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알았지?”
“알았어. 안 그래도, 또 보기로 했어.”
“알아서 잘하네.”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시원했다. 재준은 감자튀김을 칠리소스에 듬뿍 찍어 먹었고, 나는 어니언 소스를 살짝 찍어 먹었다.
재준은 금세 맥주를 홀로 들이켠 후에 말했다. “가만 보니까 내가 문제인데?”
“갑자기 무슨 문제?”
재준은 나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아니. 내 연애 말이야. 솔직히 말하면 지금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잘 때 빼고는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해. 휴대폰비도 너무 많이 나와서 요금제도 바꿨어. 나도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이게 내가 생각했던 연애인가 싶거든.”
“그럼 네가 원래 생각했던 연애는 어땠는데?”
재준은 감자튀김을 입에 넣고 휴지로 손가락 끝을 닦더니 말없이 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거의 지고 있었다. 주점이 즐비한 거리 앞으로 학생들 몇이 지났고, 편의점에서 무언가를 바리바리 사들고 사람들이 나왔다. 학기 중만큼 활기를 띠지는 않아 주변은 꽤나 조용했다. 재준은 맥주와 안주에 입도 대지 않고 꽤나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 사이 나는 맥주를 마셨고, 감자튀김을 먹었다.
재준이 헛기침을 내고 입을 뗐다. “사실은 내가 바랐던 연애가 없었어.”
“그럴 수 있지. 나도 잘 몰라.”
“좋아. 그럼 나는 그걸 생각해봐야겠다. 지금까지 내가 바라는 연애의 모습을 생각해본 적 없었어. 그냥 자유롭게 놀고 연애만 하고 싶어 했지, 어떤 식이어야 하는지는 고민하지를 않았던 거야. 좋아, 이거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니, 이게 나한테 자연스러운 거야.”
재준은 맥주를 길게 들이켰다. 잔을 내려놓았을 때,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말을 잇지 않았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팔짱을 끼고 풀기를 반복했다. 골몰히 궁리하는 듯했다. 나도 별말 없이 맥주를 마시고 안주를 집어먹었다. 재준은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감자튀김만을 노려보았다. 재준이 그토록 진지한 얼굴을 할 수 있는지 새삼 놀랐다. 시험이 끝나고 처음 술자리를 가질 때에도 알아보았지만, 그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재준이 전공 과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도 없고 당연히 여태껏 베껴서 제출했을 것이 뻔했지만, 만약 재준이 진심으로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면 지금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을 듯했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물론 다른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본다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이런 상태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있었지만, 각자 홀로 앉아 있었다. 재준이 생각하는 동안 나는 수진을 생각했고, 수진과의 관계도 생각했다. 나에게 어떤 연애, 그리고 어떤 관계가 맞는 건지 고민해도 딱히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재준은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했고, 찾는다면 어떤 답을 내게 들려줄지도 기대가 됐다.
우리가 맥주 한 잔을 거의 비우자 재준은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술을 사 들고 재준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정리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옷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희미하게 구린내도 났다. 재준은 방에 들자마자 바로 창문을 열었다. 방바닥에 옷가지들을 발로 대충 구석으로 밀어 놓고 술자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술을 섞어 마셨다. 빠르게 취기가 올랐다. 자취방에서 재준은 더 이상 지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연애와 관계에 대해서도 말을 삼갔고, 나도 묻지는 않았다. 재준은 다른 주제로 수다스러웠다. 취기 때문인지, 재미가 없기 때문인지 재준의 말이 이해할 수 없었다. 재준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아내기도 전에 주제는 금세 바뀌어 다른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는 포기하고 그냥 들었다. 술잔을 계속 부딪쳤고, 우리는 빠르게 취했다.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급히 어머니에게 문자 하나를 남겨놓았다. 재준과 나는 술자리도 치우지 않고 대충 자리를 잡고 누웠다. 몸을 뉘이자 머리가 돌았다. 세상이 수많은 중심을 기준으로 회전했다. 좌반구는 왼쪽으로 우반구는 오른쪽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좌우의 회전의 격차가 서서히 커졌다. 속이 메슥거렸다. 내가 잠에 빠지고 있는지 마취가 되어 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몹시 힘들었다.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