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초딩의 일기장 07

by 박준택


“아빠가 그것도 모르면 어떡해요!”
“가만있어 봐. 근데 이게 왜 이렇게 기억이 안 나지? 분명히 쓸 줄 알았는데......”

서현 아빠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네요. 얼마 전에 학교에서 내준 가계도를 그려 오라는 아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있는데, 그만 아들 이름을 한자로 쓰는 부분에서 콱 막히고 맙니다. 대학 때 한문학과 한문 소설을 수강하고 겨울방학 때는 <논어> 특강까지 들었는데, 아들 이름을 한자로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까지 한 사람이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빠의 스타일이 아들 앞에서 완전히 구겨지고 있네요.

‘박’은 나하고 성을 같이 쓰니까 ‘朴’이라고 쓰면 되는데, ‘서’와 ‘현’은 어떻게 쓰는지 가물가물합니다. ‘마을 서’ 자를 써 놓고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왼쪽이 무언가 허전하네요. 뭐가 더 붙어야 할까요? ‘현’에는 삼수변이 붙는지 붙지 않는지도 헷갈립니다. 창피하지만 할 수 있나요, 옥편을 손에 넣고 얼른 찾아볼 수밖에요.

“아빠 뭐야, 순 엉터리네! 그거 하나 못 쓰고!”
“그럼 너는 쓸 줄 알아?” 하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간질간질하지만, 그걸 내뱉었다가는 열 배 백 배 더 잔인하게 긁힐 것이 틀림없습니다. 꼬리를 얼른 내려야 지혜로운 사람이죠.

“응, 서현아 미안! 조금만 기다려 봐!”
침을 묻힌 손가락이 허둥지둥 옥편 위에서 파라락 날아다닙니다. 이윽고 한자 표기가 완성되었습니다. 朴曙泫. ‘새벽녘에 반짝반짝 빛나는 이슬’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멋지죠?




아이가 아내의 배 속에 있을 때 ‘이슬’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쁜 딸을 기대하면서. 여동생 하나 없이 자란 저는 여동생 같은 귀여운 딸을 하나 얻고 싶었고, 아기자기 꾸미길 좋아하는 아내도 그것이 가능한 예쁜 딸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내와 함께 산부인과로 몇 차례 진찰 다니면서 분위기가 어째 아들인 것 같아 이름에 수정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주례를 서 주셨던 목사님을 찾아가서 작명을 부탁드렸더니, 그분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은 아빠의 특권이라나요. 특권이라니까 할 수 없죠. 아빠인 제가 손수 이름을 지을 수밖에요.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하나요? 그걸 가지고 아내가 아이를 낳기까지 2개월 정도 옥편을 끼고 끙끙 앓았습니다. 이름 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옥편을 이리 뒤지고 저리 넘겨도 이름자가 잘 꿰지지 않습니다.

침례 요한을 생각하면서 ‘서현’이라는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왠지 남자 이름보다는 여자아이 이름 같습니다. 한참 결정을 미루다가 사학을 전공한 직장 동료의 말을 듣고 그 이름으로 정하였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아빠 이름도 서현이라고 하더군요.




아빠가 지은 아들의 이름 속에는 아들을 향한 아빠의 심오한 뜻-훌륭한 사람이 되라는-이 담겨 있습니다. 아빠는 서현이가 아침을 예비하면서 풀잎 끝에 맺혀 어스름한 새벽빛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이슬이 되기를 원합니다. 아침 햇살이면 더 좋겠지만 아침 햇살은 그 주인에게 넘겨 드리고, 새벽이슬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다면 족합니다. 침례 요한과 같은 삶을 기대한 것이죠.

사실, 침례 요한의 삶은 기구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는 집도 없이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었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생활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노숙자였습니다. 오래 살지도 못하였고, 감옥에 갇혀 지내다 비참한 죽음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왕비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잘 추었다고 그 딸에게 준 선물이 바로 그의 목이었으니까요.

이 세상의 어느 부모치고 자식이 그런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과거 급제해서 등용문에 오르고 높은 벼슬을 차지하여 권세를 휘두르든가 큰 재물을 모아 뻔쩍뻔쩍하는 백 평짜리 아파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원하겠지요. 그것이 부모의 낙이고 세상 사는 맛이기도 하고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침례 요한은 실패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라고 평가하셨습니다(마 11:11). 주님의 길을 예비한, 가장 아름다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저는 아들이 흔히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여기는 자리에 오르기보다 주님이 가장 크다고 인정하는 자리에 오르기 원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달고 활짝 열린 길보다 쓰고 척박하여 아무도 찾지 않는 좁디좁은 길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두 얼굴을 가진 부모의 딜레마입니다.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걱정이 되기도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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