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저 이십 분 후에 약속 있어 나가 봐야 하는데요, 제가 그냥 빨리 만들어 먹으면 안 되나요? 저도 그걸 만들어 먹을 줄 알 거든요.”
집에서 학교 일 마무리하느라 정신없는 아내에게 업무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아들 친구 접대하기가 그것입니다. 서현이가 제일 친한 친구인 주빈이를 데려온 것입니다. 아들이 친구를 데려온 것인지 친구가 알아서 붙어온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 집 식탁에 서현이와 친구가 마주 보며 앉아 있네요. 우리 집에 강적이 하나 나타난 것이지요.
주빈이는 작년에 서현이와 같은 반이었지만 삼학년인 올해는 각 반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도 맨날 같이 어울려 다니며 가장 친하게 지냅니다. 키는 서현이보다 머리 하나가 더 올라갈 정도로 큽니다. 고슴도치 머리카락에 얼굴도 까무잡잡할 뿐 아니라 목소리도 굵어 상당히 위협적(?)이고요. 언뜻 보면 중학생 같기도 한 덩치의 소유자입니다.
우리 가족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는 서현이가 외할머니댁에서 지냈기 때문에, 주빈이도 서현이 외할머니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녀석은 외할머니댁의 출입문 비밀번호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습니다. 외할머니는 낮잠 자고 있고 처제는 샤워하고 있었나 봅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처제가 무언가에 놀라 ‘꺄악!’ 하고 소리를 질렀고, 처제가 지른 소리에 놀란 외할머니도 방에서 후다닥 뛰쳐나왔다고 합니다. 어두운색 점퍼를 입고 식탁에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던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자기도 놀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더랍니다. 상상이 가시나요? 그 놀랍고 어색한 상황이? 글쎄 그 녀석이, 서현이와 동행하지도 않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서 식탁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저녁에 서현이는 외할머니와 처제로부터 비밀번호 노출과 괴한의 무단 가택 난입 건으로 인하여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올 수 있는 모든 언어로 무참한 테러를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빈이는 아직도 서현이 외할머니댁의 비밀번호를 죄다 외고 있습니다. 외할머니와 처제가 비밀번호 바꾸는 방법을 지금까지도 모르거든요.
“응? 조금만 기다려! 아줌마 일 다 끝났거든.”
“아줌마, 저 지금 얼른 가야 하거든요!”
요 녀석 보세요, 완전 제집이네요.
“그래, 알았어. 근데 주빈이는 콘프로스트를 얼마 넣어야 하나?”
“까득이요!”
“그래? 주빈이는 대장부네. 서현이는?”
“저도 까득이요!”
요 녀석들 보세요, 둘이서 오늘 우리 집 비상식량을 다 거덜 냅니다.
“주빈아, 일전에 서현이가 분양해 준 물고기는 잘 크고 있니?”
“그럼요. 서현이가 한 마리 또 줬는데, 걔도 잘 키우고 있어요.”
“한 마리 또 가져갔어?”
아내의 가늘어진 눈꼬리가 아들에게 향합니다. 서현이는 아내의 번뜩이는 눈빛을 피해 얼른 먹는 일에 집중하고요. 저녁때 아내의 고문이 한 판 예상됩니다. 서현이가 주빈이를 집에 데려와서 거실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 자랑을 하였는데, 주빈이는 그게 무척 부러웠나 봅니다. 외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그 가운데 제법 자란 중간 크기의 열대어 한 마리를 주었는데, 그 후 한 마리를 더 가져갔나 봅니다.
사실, 주고받은 것만 따지고 보면 서현이가 친구에게 더욱 많은 빚을 졌습니다. 아직도 돈을 사용할 줄 모르는 서현이에게 용돈을 주지 않기 때문에 학교나 학원이 끝나면 서현이는 친구에게 빌붙어 어묵이며 떡볶이를 얻어먹기도 하고 딱지 등을 얻어서 함께 놀기도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주빈이는 서현이 보디가드 역할도 해 줍니다. 덩치가 남달리 크고 인상도 험악해서 녀석이 서현이 뒤에 서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서현이를 건들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녀석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대가로 우리 아들이 가끔 친구의 가방을 들어주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들 녀석은 그 사실을 우리 부부에게 자랑스럽게 공개하기도 하는데, 그 말을 듣고 있을 때면 약간 속상해집니다.
“사내 녀석이 창피하게 친구의 가방을 들어 주면 어떻게 하니!”
가만있을 아내가 아니죠.
“게다가 넌 태권도 풍 띠고, 걔는 너보다 한 단계 더 낮은 빨간 띠잖아!”
무림 계의 질서를 보면 분명 서현이가 친구에게 가방을 맡겨야 할 것 같은데, 두 녀석이 무림 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아빠도 어지럽혀진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끼어듭니다.
“서현아, 아빠 어렸을 때는 안 그랬다. 내 밑에는 항상 부하가 대여섯 명은 따라다녔다.”
아빠 어렸을 땐 정말 그랬습니다. 지금은 자라다 만 아빠의 키가 작은 편에 속해 힘도 약해 보이지만, 초등학생 때는 반에서 키가 제일 컸으니까요. 덩치도 크고 몸이 날랜 데다가 육상부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두 편으로 갈라서 전쟁놀이할 때면 연탄재와 나무칼을 들고 제가 항상 선두에 섰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지만, 서현이가 친구의 가방을 들어다 주든 친구가 서현이의 가방을 들어다 주든 상관없습니다. 두 녀석 모두 제 아들이니까요. 혼자 크고 있는 서현이에게 친구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더군다나 두 녀석 다 허물없이 밝게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학원이다 과외다 숙제다 해서 공부에만 매달려 쫓겨 다니는 아이들이 이렇게 친구를 사귀면서 서로를 알아 가고 형제들처럼 우정을 쌓아갈 수 있다는 것이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서현이와 친구가 서로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때로는 사이좋게 지내고 때로는 다투고 헤어졌다가는 다시 만나서 어울려 다니던 그 시절을 서로 ‘좋았다’라고 추억하며 서로에게 서로가 소중한 자락 하나씩을 차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