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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5. 2022

성전 재건 참여자들의 ‘명단’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2

본문|에스라 2: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3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중략... 39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40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1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42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 43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중략... 54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55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중략... 아미 자손이니 58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59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60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61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62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3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중략... 7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할 때, 우리는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마치 ‘늪’과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레위기나 이사야서를 비롯한 예언서들을 읽을 때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의미들로 인해 계속 읽어야 할지 아니면 그냥 건너뛰어야 할지 갈등에 빠지곤 합니다. 더러 용기를 내서 몇 장을 넘겨보기도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수면제가 온몸에 퍼져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본문 말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숫자만 우리의 눈을 흔들리게 합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바로 그러한 ‘늪’과 같은 말씀 속에 천지와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그 의미를 곰곰이 되씹어보면 허약한 심령에 보약이 되는 ‘진액’이 끊임없이 배어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돌아온 이들의 명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데, 2-58절은 족보(가계)나 본적지 증명이 가능한 사람들이고, 59-63절은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가능한 이들은 다시 11명의 지도자를 비롯하여(2절, 느헤미야는 12명으로 소개), 평민들, 성전 봉사자들, 막일이나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평민들과 제사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온 사람들이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이 바로 그 이후의 ‘참 이스라엘’을 구성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교회가 바로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명단 속에 들어 있는 그들의 어떤 점이, 향후 전개될 유다 사회를 ‘참 이스라엘’로 만드는 데 진정한 원동력이 되었을까요?         


      

  그들이 바라본 곳     


  고레스 칙령은, 구속력 있는 ‘강제 명령’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예루살렘 귀환에 대한 ‘허락’의 성격이 더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대로 그곳에 머무를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돌아가기로 정하게 되면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와 희생이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에, 벅찬 기쁨과 동시에 엄청난 심리적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 신분이었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고레스 왕의 이방인 포용 정책에 따라 대체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집도 생기고, 농지도 생기고, 그로 인해 그들 나름의 기득권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치러야 할 희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과 이별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모든 가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아무 문제 없겠지만, 그곳 원주민과 결혼하여 새 가정을 형성한 이들은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그 문제로 의사 결정을 하면서 고통스러운 갈등에 빠질 것이 빤하고, 심지어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족들끼리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돌아가는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그들 앞에는 치러야 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2,400km 이상의 광야 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그것도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노모와 어린아이까지 함께 가야만 하는 그 길이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들 그들을 반겨줄 친척이나 안락한 집, 또는 풍성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땅덩어리뿐입니다. 새로 집을 짓고 황무지를 옥토가 되도록 일구기 위해서는 뼈가 빠지도록 일해야 하고, 그 와중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도 동원되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된다면 그때도 바벨론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아니 오히려 고통만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요? 저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냥 바벨론 땅에 눌러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고, 그것도 구체적으로 이름과 사람의 수까지 적어가면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머릿속에 오버랩(overlap) 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창 12:1), 정말 그곳을 떠나 말씀을 따라가 버렸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약속 하나만 달랑 믿고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똑같이, 지금 바벨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재건하라는 그분의 소명을 받은 즉시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다 일어나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이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똑같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작 중요한 관심은 바벨론의 안락한 삶보다 성전을 재건하는 데 있었고, 재건된 성전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축복받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 이스라엘’의 자격이 있고, 바로 그런 점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소명, 즉 성전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공개한 명단을 보면서,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명단 이면에서 힘 있게 내딛는 그들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도 지금 우리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약속 있는 소명 앞에서 자신들이 딛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오직 성전 재건을 위해 흔쾌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그들처럼, 얽매이기 쉬운 무거운 죄와 짐을 다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 있는 소명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그들도 바라본 곳     


  본문이 소개한 명단 안에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43-54절에는 느디님 사람들의 자손들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막일하던 종들입니다. 느디님 자손들이 성전에서 막일하던 종들이었다면, 55-58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은 왕궁에서 천한 일을 하던 이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온 후 종이 되어, 이스라엘 사회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정당한 대우가 아닌 푸대접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처지에서 볼 때 바벨론에 그냥 머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들의 명단이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재건 명단의 한가운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59-6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족보나 본적지를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던 이스라엘 사회의 관습에서 볼 때, 그것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은 이전에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들과 또 앞서 소개한 느디님 자손이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도 느디님이나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이 그 명단에 버젓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제시한 두 부류 사람들은 왜 바벨론이 아닌 예루살렘을 선택하였던 것일까요? 본문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 동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황상 하나님의 소명과 약속이 바벨론에서의 삶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였다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예루살렘을 왜 선택합니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기생 라합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고, 이런 점 때문에 향후 전개된 이스라엘 공동체가 ‘참 이스라엘’을 이루는 데에 그들의 동참이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디님 사람의 자손들,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 그리고 족보도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와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의 명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의 역사는 몇몇 사사들과 몇몇 왕들이 주인공이 되어 역사를 좌우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의 역사는 스룹바벨과 같은 지도자나 제사장들, 족보나 본적지가 있는 정통 평민들뿐 아니라 종이나 하층민, 그리고 족보나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까지 모두 ‘하나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500년 뒤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교회에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몇몇 주도적인 사람만 등장하나요?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은 포로기 이후의 ‘참 이스라엘’ 사회처럼, 어떤 특정인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행 2:21),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가족이 되어(마 12:50), 신약시대의 ‘참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고, 그래서 그 복음이 이끌어가는 역사가 ‘진정한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족보나 본적지와 같은 든든한 배경이 없어 맨날 루저(looser)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푸념하거나 불평할 때가 있습니까? 만약 그 일로 인하여 우리가 자꾸만 작아진다면, 그때는 우리 인생에서 ‘위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귀중한 ‘기회’가 됩니다.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믿음 하나 붙들고 성전 재건을 위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유다 백성들처럼, 지금 우리도 그 모습 그대로 겨자씨 같은 믿음 하나 붙들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들의 이름이 ‘참 이스라엘’의 명단에, ‘그 위대한 명단’에 올라갔던 것처럼, 우리의 이름도 ‘참 교회’의 명단에 새겨지고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열어 준 정말 좋은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굳게 붙잡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볼 곳     


  에스라는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 재건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명단에는 스룹바벨과 같은 지도자와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직자가 들어 있고, 족보와 본적지가 분명한 보통 사람들도 들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나 막일하는 노동자들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족보나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들도 끼어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참 이스라엘’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이런 배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원동력은 성전 재건을 위하여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눈앞에 있는 희생만 바라보았다면 애초에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 뒤에 있는 찬란한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어려운 발걸음을 즐거운 마음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참 이스라엘’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소명은, 어쩌면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보다 더 어려운 과제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길에는 희생할 것이 너무 많고 핍박(박해)도 무수하게 널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인 상급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이 구원받은 자들의 명단뿐 아니라, 참 교회를 세우는 데 원동력이 된 명단 속에도 생생하게 새겨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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