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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6. 2022

우리도 ‘그들처럼’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3

본문|에스라 3: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그들     


  에스라서 1장은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이끄신 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잊지 않고 밝히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들의 명단과 인원수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뒤를 이어, 본문인 3장은 바로 그 사람들이 유대 땅에 거주한 후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 무사히 안착하여 각자의 성읍에 살고 있던 그들은, 일곱째 달이 되자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째 달은 굉장히 중요한 달입니다. 일곱째 달의 1일에는 ‘나팔절’이, 10일에는 ‘대속죄일’이 있고, 15일에는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이 있기 때문에, 일곱째 달에는 거의 한 달 내내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귀환자들’인 그들도 그 전례에 따라 그 기간 한마음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1-6절).     


  그렇지만 여호와의 성전 기초는 그때까지도 놓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성전 재건을 준비하기 위해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는 한편, 솔로몬 왕이 그랬던 것처럼 시돈과 두로 사람들을 시켜 레바논 산지의 백향목을 이스라엘 서부 해안 지역인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이후에, 그들의 귀환 두 번째 해의 둘째 달에 마침내 성전 재건의 초석이 되는 기초를 놓았습니다(6-13절).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워진 제단     


  그들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귀중한 지침이 되는 것들입니다. 먼저 3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말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무리가 다른 터에 세워야 할 제단을 두려움 때문에 그 터에 세웠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터에 세웠다는 말인지, 그리고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두려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 뜻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자가 맞는 것일까요, 후자가 맞는 것일까요? 또 그 상관관계는 무엇일까요?     


  히브리 원어와 여러 번역본을 종합해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땅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지만, 그들은 마땅히 세워져야 할 곳인 바로 그 터전 위에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땅 주변 사람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세워져야 할 곳인 바로 그 터 위에 제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그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림으로써 (그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하였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 속에는 첫 번째 의미 속에 담겨 있는 그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터는 양보할 수 없었다’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그 터에 제단을 설치한 이유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그 터’는 솔로몬이 세웠던 1차 성전 터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터 위에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두려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모든 나라 백성’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과 그 주변에 살던 여러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런 민족들 가운데 아시리아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서 사마리아 주변에 정착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만약 옛 영화의 상징인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에 성전이 재건된다면,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고 다시 이스라엘이 강성한 민족이 된다면, 이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기득권(헤게모니)을 쥐고 있던 주변 민족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터에 제단을 세운다는 것은 주변 민족들에게 그런 의미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핍박이나 보복,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그 터에 제단을 세우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바로 그 터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역대기서’ 기자는 그 터의 의미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고 또 다윗이 지정한 곳이었기 때문에, 제단을 세울 장소로서의 그 터는 유다 백성에게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 어떤 두려움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 이면에는 또 이런 믿음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두려워할 때 오히려 올무에 빠진다. 바로 그 자리에 제단을 세워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자.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이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을 선물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사수하는 태도와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였던 그들의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울림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들과 똑같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것이고, 이 땅에 굳건하게 세워야 할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사수할 때 그들에게 임하였던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밀려올 수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소중한 것들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두려움이 밀려온다면, 아니 우리를 위협하며 두렵게 하는 것이 분명 밀려오겠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평안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분만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대로' 하는 태도     


  유다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볼 또 다른 대목은, 바로 ‘~대로 하는 태도’입니다. 본문 속에는 ‘~대로 하는’ 그들의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그들은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하였습니다(2절). 초막절을 지킬 때도 “기록된 규례대로” 지켰습니다(4절). 성전 기초를 놓으면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도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규례대로” 하였습니다(10절). 심지어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할 때도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하였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7절).   

  

  이들의 이런 태도는 이전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사람들의 태도와 비교할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를 마감하면서 기자는 당시 사람들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기에서 중의법으로 사용된 ‘왕’은 세상 ‘왕’과 왕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신 여호와 하나님 없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회는 통제 불능에 빠져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 시대의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되었습니까? 수많은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거기에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그들을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사 50:10).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하지만 70년이 지나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이런 모습이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습니다. 마치 꼭두각시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자기 소견도 없어 보이고, 순한 양이 되어 율법과 규례, 심지어는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서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 순종이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백성에게 성전 재건의 소명을 맡겨 주셨고, 또 이들을 통하여 ‘참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들에게서 옮겨 심어야 할 태도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소견의 옳은 대로 하지 않고 주님의 소견대로 살 수 있도록 기꺼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뜻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은 바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으로     


  12-13절은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본 백성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큰 기쁨을 담은 그들의 큰 함성이 우리의 귀와 심장에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 장면이 현대 교회에서도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맞을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온갖 두려움도 그들의 열정 가득한 믿음을 꺾지는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믿음이 그들을 두르고 있던 두려움을 말끔하게 지워 버렸습니다.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의 소견을 완전히 지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재현하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멀리까지 들렸던 그들의 기쁨 소리가 교회 안에서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이 단순하게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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