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4
본문|에스라 4: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지금의 세계정세를 들여다보면, 상생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해 관련 국가들을 압박합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수입 관세를 상향 조정하여 미국 내에서의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중국도 밀리지 않기 위해 같은 정책을 펴서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한반도 상황은 이와 성격이 다르지만, 기저에는 역시 자국 이익 우선 정책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함으로써 우리나라 경제를 위협할 수 있는 민감한 소재와 부품으로 양국 간의 역사, 정치, 외교 등의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밀리지 않기 위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고, 국민은 국민대로 불매 운동을 통하여 일본 경제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한때 북한은 남북 정상 회담, 북미 정상 회담 등으로 화해 국면을 조성하여 그것으로 경제 문제 해결을 모색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의 협상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자 여러 차례의 미사일 발사를 통하여 한미를 압박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주도권을 자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들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이란과 군사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뿐만이 아닙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얽히고설킨 여러 가지 이해 문제로 인하여 갈등과 분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시대만 다를 뿐 이와 똑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남쪽 지역 유다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 종들까지 포함하여 5만 명 가까이 되었는데,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고레스 칙령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고레스 왕 즉위 둘째 해에 성전을 재건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3:7), 그다음 해인 기원전 536년부터 성전 기초를 놓기 시작하였습니다(3:8-13).
그 소식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 귀에 들렸습니다(1절). 유다 백성이 돌아와서 정착한 것도 불편하던 판에, 성전을 재건한다는 소식은 이제 그들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1차 성전은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성전이 재건된다는 것은, 대적들의 시각에서 볼 때, 유다가 다윗과 솔로몬 왕조 때처럼 부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국제 역학 관계를 볼 때 한쪽이 강성해지면 다른 쪽은 그쪽에 편입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대적들은 유다의 성전 재건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생존과 관련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전 재건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대적들은 두 가지 방법을 통해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는데, 먼저는 회유책을, 나중에는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강공책을 썼습니다.
(1) 그들이 사용한 회유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내용이 2-3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그들은 자신들도 성전 건축을 돕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또 그 일을 돕는 합당한 이유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처럼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가 이곳에 온 날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함께 돕는 것이 당연하다.’ 일견 그들의 논리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시리아의 에살핫돈 왕에 의하여 바벨론 등지에서 강제로 이주한 사람들입니다. ‘에살핫돈’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셋째 아들로, 기원전 681년부터 669년까지 12년 동안 아시리아를 통치한 왕입니다. 따라서 대적들은 그때 강제로 이주하여 성전 기초를 놓은 기원전 536년까지, 최소 130년 이상을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이와 같은 이주 정책은 반란을 막기 위해 취해졌는데, 실상은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그때 그곳 백성들을 추방하고, 대신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왕하 17:24). 그 결과 그 지역은 민족, 언어, 관습, 종교 의식 등도 혼합되는 현상이 초래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아시리아 왕은 제사장을 벧엘로 보내 그곳 거주민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왕하 17:25). 그래서 대적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사실이었고, 함께 건축하자는 그들의 제안은 성전 재건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2) 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공책을 선택하여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4-5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손을 약하게 하다’라는 말은 ‘손’이 의미하는 ‘능력’, ‘의욕’ 등을 감하거나 나태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 의욕을 잃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하려고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하는 방해 공작을 폈다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그들은 그러한 방법을 통하여 유다를 두려움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느 6:9). 본문에는 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위협, 훼방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 결과 유다 백성들의 건축 의지는 상당 부분 약화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대적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계획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관리들’은 페르시아의 고위 공직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페르시아 왕실의 관리로, 법정의 민원 담당자들이나 고문관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관리들은 행정, 사법 등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뇌물은 공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출 23:8). 따라서 그들이 이런 방법을 썼다는 것은,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라는 그들의 진술(2절)도 거짓이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을 계속해서 방해하였고, 그 결과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1년)까지 성전 공사가 중단되는 실효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24절).
(1) 이번에는 대적들의 방해에 유다 백성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들은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 즉 대적들의 회유책을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3절). 백성들이 거절한 이유는, 한마디로 그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둘 사이에는 상관이 없을까요? 첫 번째는, 신앙 부분에서 상관이 없었습니다. 대적들은 비록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의 상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 혼합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행태에 대하여 열왕기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왕하 17:28-29). 여호와 하나님은 우상을 부정하고 있고(사 41:29),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눅 16:13;고전 10:21). 그러므로 대적들은 비록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분과 관계없는 우상만 섬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은 그들이 함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과 함께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유다 백성은 대적들의 종교 혼합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유다 사회도 그들의 영향을 받아 종교 혼합주의에 물들 것입니다. 또한, 회유책을 쓴 목적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데 있었으므로, 대적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공사를 지연시킬 게 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적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일이 행정적으로 둘 사이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대적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홀로 건축하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2) 대적들의 강공책에 유다 백성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는 본문에서 그 내용을 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대적들은 유다 백성이 두려움에 빠지도록 온갖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 건축 계획을 막았습니다. 만약 유다 백성이 같은 방법으로 대처하였다면, 다시 말해서 그들도 대적들을 위협하고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였다면, 저자인 에스라는 성경에 그 내용을 밝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침묵으로, 하지만 그 일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는 방식으로 대처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그들은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에게 선하게 대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출 23:4). “원수를 갚지 말며...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또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려고 오신 예수님은(마 5:17), 산상수훈을 통해 원수에게 이렇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들이 이러한 태도로 대하지 않고 대적들처럼 대하였다면, 그래서 성전이 중단되지 않고 완공되었다면 그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전을 건축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분과 화합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면, 원수들은 오히려 완공된 그 성전을 보면서 이렇게 비난할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은 사랑도 없는 분이시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분이시냐?” 하지만 본문에는 그들이 이렇게 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가타부타하지 않고, 침묵으로 그들의 신앙을 드러냈고, 그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침묵이 위대한 것입니다.
대적들의 방해에 대처하였던 유다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유다 백성들의 소임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의 소명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성전 건축이 종교 혼합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듯, 교회를 세우는 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함께한다면 교회는 그 순수성을 잃고 사교 집단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교회는 많은 부분 세상과 타협하면서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순수성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변화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교회가 타협하지 않고 순수성을 지킬 때, 대적들은 거기에서 행동을 멈출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기를 쓰고 달려듭니다. 온갖 위협으로 두려움에 빠뜨리고, 심지어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즉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박해를 가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던 백성들에게 그랬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일들이 몰아칠 때, 우리는 유다 백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침묵하였습니다. 그들은 침묵하면서 주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통하여 악을 선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결과는 우리에게 실망과 낙담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에 빠져서는 절대 안 됩니다. 실망과 낙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낳으므로, 그런 감정에서 빠져나와 이와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성전 건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지, 파괴되거나 영원히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2년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4년 후인 다리오 왕 6년에 완공되었습니다(6:13-15).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대적들의 방해와 그로 인한 중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살아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분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낙담과 실망이 아닌,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순수성을 지키고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자신이 원수를 사랑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또 우리 앞에 지금은 실망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상황을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바꾸실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그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대처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소원은 소원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