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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6. 2022

‘다시’ 시작된 성전 건축 작업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5

본문|에스라 5: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성전 건축이 중단된 원인     


  시간은 기본적으로 중립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긍정적인 열매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전 모습은 후자에 속합니다.     


  유다의 대적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습니다.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그 결과 성전 건축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4:24).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되었으므로, 성전 기초를 놓은 기원전 536년을 기점으로 하면 최대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사가 중단된 원인을 대적들의 방해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일어난 유다 백성들이(1:5), 그렇게 쉽게 대적들의 방해에 굴복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를 무력화할 수 있는 고레스 왕의 칙령을 가지고 있었고,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의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건축이 중단된 원인이 대적들의 방해보다 더 근원적인 데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원인이 1절과 2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주어지자 성전이 다시 건축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들이 어떤 예언의 말씀을 전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학개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학 1:2,49).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로 손이 점차 약해지자, 즉 성전 건축의 의지가 꺾이자(4:4),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기 합리화해 버렸습니다.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관심을 성전 건축보다 자신들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잘 꾸민 집에서 안주하거나 자기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황폐된 성전을 그대로 방치해 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학개를 통하여 책망하셨고, 또 스가랴를 통하여 그런 죄에서 돌이켜 ‘내게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셨던 것입니다(슥 1:3).     



  두 가지 교훈     


  성전 건축이 중단된 근본적인 원인이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첫째, 부정적인 상황 앞에서 자기 합리화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유다를 둘러싼 주변 나라들은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적들의 행동은 분명 유다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성전 재건을 중단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의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두 가지의 히든카드가 손안에 들려 있었습니다. ‘고레스 왕의 칙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레스 칙령은 대적들의 모든 시도를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만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면, 대적들의 위협은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대적들의 방해 앞에서 두 장의 히든카드를 모두 버리고 자기 합리화의 길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자기 합리화’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은 ‘합리화’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하게 함”, “낭비적인 요소나 비능률적 요소를 없애 더 능률적으로 체제를 개선함”. 따라서 합리화는 그 기준이 객관성에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합리화’는 그 기준이 주관성, 즉 자기 자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합리화를 할 경우, 부정적인 상황에서 생긴 감정적인 상처나 실망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회피해 버립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로 이런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는 부정적인 상황을 만들었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그 상황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은 여전히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보는 눈(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이 긍정적인 의미의 객관적인 합리화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들의 생각을 내려놓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대적들의 방해로 괴롭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또 함께하시는 그분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으로 믿고 묵묵히 그렇지만 부지런히 성전 건축에 매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적들의 방해를 묵인하신 것도 바로 이런 모습을 통하여 영광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쓰다 보면, 유다 백성들이 직면하였던 것과 같은 부정적인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부정적인 상황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유다 백성들처럼 자기 합리화의 모순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 앞에 주어진 소명에 매진해야 합니다.     


  두 번째 교훈은, 우선순위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집을 세우는 일에 빨랐던 이유는, 그들이 일의 우선순위를 혼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까? 자신들의 집을 짓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고레스 왕도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거듭되는 대적들의 방해와 자기 합리화의 결과 그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우선순위를 바꾼 이유는 자명합니다.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이 더욱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먼저 짓고 경제력도 튼튼히 세워 안락한 생활을 누린 후에 성전은 나중에 지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졌을까요? 결과는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 1:9-11).     


  그들은 왜 이러한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우선순위를 혼동하여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이 제시하신 말씀과도 배치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유다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가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주어진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먼저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르게 할 때,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살피시는 하나님에 의해 충족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자기 합리화와 잘못된 우선순위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책망과 촉구에 마음을 돌이켜서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책망과 촉구는 분명 그들의 마음을 각성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동력이 부족합니다. 책망과 촉구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여전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도록 할 수 있는 또 다른 동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것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그분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친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함께하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학 1:1-13;2:4-5). 또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학 2:19-23). 그런가 하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너희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슥 1:16-17). 선택하신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약속,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위로하시겠다는 약속, 그리고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 약속은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대와 흥분 속에서 뛰놀게 했습니다. 성전이 다시 건축되고 성읍도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은, 그들의 팔뚝에 힘을 주고 소매를 걷어붙이게 하였습니다.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2절).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울 때 그분의 책망과 촉구 앞에 의무감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마음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만 있다면 교회를 세우는 우리의 노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유지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약속입니다.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부하게 채우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만약 그 약속이 정말 틀림없다면 우리 앞에 거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공사를 재개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 닷드내와 그의 일행이 찾아와서 장로들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3-4절).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건축하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지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유다의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에 그들도 능히 공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5절). 고레스 칙령을 검토한 다리오 왕에 의하여 성전 건축을 신속히 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에 성전은 완공되었습니다(6:12-15).     



  초심으로 돌아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결과는 긍정적으로 돌아옵니다. 그 시간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은 그 시간 속에서 흘러갑니다. 그 상황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와 관계없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그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그래서 그분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상황이 최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시간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자기 합리화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은, 그 긴 시간을 올바르지 못한 곳에 사용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방치되었고 자신들의 생활도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맨 처음 대적들의 방해가 주어졌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였습니다(4:3). 그렇지만 계속되는 방해 공작에 그들의 손은 약해졌고, 그러한 시간이 계속되자 그들의 관심도 점차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한 번 맞은 이슬이 옷을 젖게 할 수 없지만, 그 이슬비를 계속 맞게 되면 결국 옷은 흠뻑 젖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다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상기시켜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초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불붙어 있었고, 그 믿음을 성전 건축에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그와 같은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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