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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7. 2022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6

본문|에스라 6: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     


  성전 건축은 대적들의 방해와 유다 백성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로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예언(말씀)과 다리오 왕이 내린 조서로 성전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 아달월(3월)에 완공되었습니다(6:15).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만 70년이 지나 2차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완공된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첫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19-21절). 여기서 ‘첫째 달’은 ‘아빕월’로, 현대 달력으로는 4월경에 해당합니다.     


  유월절은 어떤 절기일까요? 유월절은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영어로 ‘Passover’인 유월절은 ‘넘어가다’, ‘지나가다’, ‘~을 뛰어넘다’라는 뜻으로,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가 애굽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넘어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 12;11-14). 이 사건은 아빕월, 즉 첫째 달 14일 저녁에 일어났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도 이날 저녁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그 큰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지키고 있는 유월절은,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지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완공된 성전을 봉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지켰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제2의 출애굽에 견줄 만한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킨 유월절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유월절에 이어 무교절을 지켰습니다(22절).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 동안, 즉 첫째 달 15일부터 21일까지 유월절의 일부로 드려집니다(출 12:15-20). 이때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는데, 이는 유월절 저녁에 빵에 누룩을 넣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애굽을 빠져나와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출 12:39).     



  두 가지 교훈     


  (1) 먼저 정결하게 하기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지킨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 두 가지 내용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볼 수 있는 첫 번째 모습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어린 양을 잡고 모든 백성이 함께 먹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20-21절).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또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바로 그분이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분과 영원토록 함께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같은 절기에 부정한 몸으로 참여하여, 그 사건을 기념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더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애초에 함께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전에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출발점이 정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몸을 정결하게 한 후에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부터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결의 반대 개념, 즉 부정의 원인이 되는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죄를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지 않고, 그분과 함께하지 않으므로 믿을 존재는 오직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성경은 더 나아가 죄인들, 즉 부정한 사람들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a).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고 자신이 주인 되어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본질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죄로 얼룩지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죽음과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다시 바르게 끼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죄인에서 의인이 될 수 있고, 마귀의 새끼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도 정결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우리가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위해 주님 안에 거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버려져 말라비틀어질 뿐만 아니라 불쏘시개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3-6).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우리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일, 즉 모든 행실에 거룩하게 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즐거움으로 지키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그들이 ‘즐거움으로’ 그 절기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즐거움으로 그 절기를 지킬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 이유가 22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그들이 즐거웠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즐겁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 그분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즐거웠던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이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돌려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기쁨의 근원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그들이 구체적인 사건에 근거해서 즐거워하였다는 것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체적인 은혜로 인해 즐거워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즐거워해야 할까요?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이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왜 즐거워합니까? 함께하고 있는 아빠와 엄마가 바로 자기의 부모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아빠 엄마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돌봐주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돌봐줄 것을 믿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즐거워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것은 부모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소원을 이루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믿음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수 없고 오직 슬픔만이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원을 아뢰지도 않고 소원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또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그분께 의지하고 아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특히나 인상적인 부분은 그 기쁨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완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종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 마냥 피상적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수박 겉 핥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촉구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현대 사회는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풍요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에 밀어내거나 부정합니다. 현대 문화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그 성격을 딱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다단하여졌고, 그 결과 순결과 감사(기쁨)라는 단어도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무엇을 회복하고 어디로 되돌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기념하였습니다. 또 무교절을 지키는 내내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그분이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사실이 즐거웠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촉구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힘이 되고 많은 열매를 맺는 소원도 이룰 수 있다고 힘주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촉구가 우리의 마음과 행동에서 메아리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할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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