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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7. 2022

에스라의 귀환 ‘준비’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8

본문|에스라 8: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더라 21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출발 전에 모인 백성들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에스라와 함께한 여정에는 남자만 1,500명이 되었습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5,000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의 ‘2차 포로 귀환’입니다. 그 숫자는 1차 포로 귀환 때와 비교할 때 1/10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의 임무는 막중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명을 주었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 둘째, 성전을 위하여 섬기라. 셋째, 올바른 재판관과 법관을 세워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라. 따라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사명을 함께 이루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기 전에 사람들을 아하와 강가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함께 가기로 한 백성들이 다 모였으면 곧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거기에서 3일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왜 3일 동안이나 머물러야 하였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우리가 나눌 내용입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에스라는 그 시간 동안 여행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기 위해 즉시 출발하지 않고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준비하였던 것일까요?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준비하였던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을 살피기     


  에스라가 장막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다는 것입니다(15절). ‘살피다’는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다’라는 뜻입니다. 살핀 대상은 ‘백성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백성이라고 하면 제사장도 포함되는데, 굳이 둘을 구분하여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였다’라는 뜻을 강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좀 더 들어가 보면,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 내용이 달랐다’라는 의미도 보입니다. ‘백성’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공동체의 뿌리와 줄기를 이루고, 공동체의 바탕과 중심이 되기 때문에, 어떤 가문에서 누가 참여하였는지, 그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지, 여행 준비는 잘 되어 있는지 등에 대해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들’은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지도자입니다. 에스라가 귀환하게 된 1차 목적이 ‘성전을 위한 것’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들이 누가 얼마나 모였는지 살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제사장들이 오지 않았다면, 설령 오더라도 극소수만 왔다면, 귀환 목적을 이룰 수 없고, 따라서 그 귀환은 애초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는 것이 일차적으로 여행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환 후 이루게 될 공동체의 밑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은 재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연필로 그리면 스케치가 되고, 목탄으로 그리면 목탄화가 됩니다. 물감을 기름에 개어 그리면 유화가 되고,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리면 수채화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인 백성과 제사장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에스라는 왕으로부터 유다 지역의 행정, 사법, 교육 등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따라서 에스라는 함께 돌아갈 사람들을 파악해서 각 지역의 통솔자와 재판관과 교육자를 누구로 세울지, 또 어떻게 운용하게 해야 할지 등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제일 먼저 하였던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태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귀한 교훈이 됩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사역할 때, 우리도 에스라처럼 제반 사항을 살피지 않으면, 즉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을 상기하면서, 에스라가 한 것처럼 함께한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야만 사전에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발견한 문제 해결하기     


  에스라가 두 번째로 하였던 일은, 발견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던 에스라는,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임무를 맡았던, 중요한 성전 관리인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성전 제사를 비롯하여 성전의 여타 업무도 마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지도자와 명철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 말을 일러준 뒤, 그들을 가시뱌 지방에 있는 족장 잇도와 그의 형제 느디님 사람들에게 보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려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인 명철한 사람을 비롯하여 40명의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 가운데 성전 일꾼 220명을 데려왔습니다(16-20절). 에스라 일행이 장막을 쳤던 아하와 강은, 바벨론 북서쪽의 아하와 성을 가로지르던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이스 강’을 말합니다. ‘가시뱌 지방’은 그곳으로부터 왕복 3일 이내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유대인을 비롯하여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견한 문제를 처리하는 에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에스라가 그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지 않고 미루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룬 시간만큼 예루살렘을 향한 출발 시간도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문제를 외면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전 제사를 비롯한 성전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문제가 있다면 애써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 해결을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자원의 부족 문제라면 채워 넣어야 하고, 죄 문제라면 과감하게 도려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도우신 하나님의 선한 손입니다. 에스라의 문제 해결 방법은 그 방법의 최선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애당초 이스라엘 백성이 아하와 강가에 모일 때 레위인들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던 사실에 있습니다. 그들이 애초 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황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모이지 않았던 사건의 전조는 1차 귀환 때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은 4,289명이 함께하였지만, 레위인들은 341명에 불과하였습니다. 돕는 자들이 도움을 받는 자들의 8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기형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2차 귀환 때는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들이 바벨론에 정착하면서 다른 직업(일)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금융업으로 부유하게 된 유대인들에 속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땅에 대한 소유권도 없던 그들에게 그곳에서는 그런 제한도 없었습니다. 그와 비교할 때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담당하게 될 성전 봉사는, 그 업무가 과중할 뿐만 아니라 보상도 지금의 윤택한 형편과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민 삼사 세대이므로 도전 정신이나 신앙 열정도 희박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2차 귀환 대열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과 함께하였던 220명의 느디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혈통 상 이스라엘 족속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들의 신분은 평민도 아닌 종입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맡게 될 업무도 존재감도 없는 성전 막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새롭게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할 동기도 너무 희박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귀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 줍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최선을 다하여 신속하게 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문제를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해결하려고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렘 33:2). 이렇게 일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고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그분께 의뢰해야 합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간구하기     


  성전 일을 도울 레위인들과 함께 느디님 사람들까지 구한 에스라에게, 풀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5,000여 명의 일행이 귀환하는 길은 직선으로 800km 정도 됩니다. 무더위를 피하고 도중에 물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길로 가려면 그 거리는 두 배로 늘어납니다. 이것만도 난관인데, 언제 어디서 도적 떼나 노상강도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에스라 일행이 가지고 가는 수많은 예물, 즉 수많은 금과 은과 그릇들은, 도적 떼와 노상강도들에게 너무도 탐나는 먹잇감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그에 버금가는 먹잇감이었습니다. 그들을 붙잡아서 노예로 팔면 곧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정보는, 이미 그들의 귀에 접수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런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호위병을 요청하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왕에게 이렇게 아뢴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십니다”(22절). 그러므로 만약 그가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게 되면, 정작 자신은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정공법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가 금식을 선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겸비하다’는 ‘낮아지다’, ‘굴복하다’라는 말로, 자신을 낮추고(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간구하기 위해서, 즉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를 통해 ‘금식’이 ‘겸비’와 ‘간구’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 스스로 겸비하여 간절히 기도하되, 그 일을 에스라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우리)이 동참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모든 백성과 모든 소유의 안전을 위하여 평탄한 길을 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23절).     



  에스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위 자손들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백성과 모든 소유가 안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스스로 겸비하여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에스라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금식 기도의 중요성과 그것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이다”(시 116:2).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실 뿐 아니라 에스라가 왕에게 말한 대로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직접 금식하는 모습이 딱 두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안디옥 교회가 선교를 위하여 바나나와 사울을 따로 세울 때이고(행 13:2-3), 또 한 번은 소아시아에서 각 교회 장로들을 택하여 그들을 주님께 위탁할 때입니다(14:23). 그래서 현대 교회는 금식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현대 교회는 스스로 겸비하는 모습과 간절히 매달리는 모습이 동시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에스라의 모습에 비춰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생각 끝에서 우리의 모습이 에스라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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