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준택 Oct 29. 2022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10

본문|에스라 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종교개혁에 담긴 의미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유다 공동체의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개혁의 대상이 종교 문제, 즉 신앙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 땅에서 구축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귀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전 재건 이후 그들의 신앙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귀환할 당시에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 일에 가담하고 있었고, 심지어 방백들과 고관들은 그런 일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그 일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그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改革)이라는 한자는 몸을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내고 새 가죽으로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가죽을 벗기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상고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개혁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막상 개혁 단계에 이르면 주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 사회에 만연한 통혼의 문제는 해결 방법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맞은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그 당사자들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칼로 무를 베듯이 싹둑 자를 수 있는 대상들이 아닙니다.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꺾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이런 이유로 에스라 앞에 놓인 종교개혁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죄를 자복하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일은 죄를 자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절).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며 죄를 자복하자,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에서 시작된 자복이 영향을 미쳐 유다 공동체에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엎드리다’라는 말은 극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지듯이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울다’라는 말은 비극적인 일로 인해 통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엎드려 울고 있는’ 그의 모습에는, 극도로 슬픈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에스라가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죄를 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에 에스라가 자복할 때, “하나님, 미안해요”라는 식으로 가볍게 자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별로 가슴 아파하지도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로 인해 고통도 미미하다면, 그 문제에서 돌이키려는 의지, 즉 개혁에 대한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종교개혁에 대한 동력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결국,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대충 개혁할 것이 빤합니다.     


  상처 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병원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으면 단순히 미안하다는 반응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죄를 정말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은 엎드려 통곡할 수밖에 없고, 그 통곡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의지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죄를 자복하되 진정성 있게 자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이 범한 통혼의 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반대되는 부정한 삶이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각 사람이 자신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0:13). 예수님은 그 심판의 참혹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맏으리라”(막 9:48-49). 죄악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므로, 우리 눈에 그 죄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더라도 그 죄는 심각하고 또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유다의 죄 앞에서 대충 넘어가지 못하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엎드려 통곡하면서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자복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노와 멸망이 아닌 축복과 소망이 가득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에스라처럼 엎드려 통곡하면서 우리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대한 개혁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습니다.     


  (2) 돕는 사람과 함께하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두 번째 필수 조건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남들과 의논하거나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하되 충성을 다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무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 북쪽 지파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은 그 문제를 먼저 솔로몬 왕을 섬겼던 노인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그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이 종이 될 것’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어린 사람들의 말, 즉 노인들의 말과 반대되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두 왕국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싸움질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에게 시사해 줍니다.     


  다행히 에스라에게는 함께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가냐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2-4절). 스가냐는 통혼으로 빚어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자는 개혁의 방법(방향)을 제안하였고, 우리가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습니다. 또 일어나 힘써 행하라며 에스라를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제안과 동참이 결국 에스라를 일으켜 세웠고, 힘써 행할 수 있는 용기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많은 문제는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서로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고전 12:25).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상처가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강력하고 효과적인(powerful and effective, NIV)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약 5:16). 함께하되 특별히 스가냐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3)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세 번째 필수 조건은,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스가냐의 말을 듣고 에스라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고, 무리는 맹세로 그에게 화답하였습니다(6절). 이는 에스라가 그 문제를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맹세로 다잡았습니다. 맹세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두말할 수 없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마음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다음에 이어질 행동에 강력한 동력(에너지)을 제공해 줍니다.     


  에스라는 그 맹세에 기초하여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가 실행에 옮긴 내용은 오늘 본문 뒤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다시 한번 스가냐의 제안대로 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첫째 달 초하루에 그 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16-17절).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들이 맹세한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 구체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유다의 종교개혁을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교훈을 던져 줍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 문제는 교묘한 자기합리화에 빠져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그로 인해 무너진 신앙 목록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방 여인들을 내보낸 것같이 내쫓은 죄가 있다면 ‘Yes’로 표시하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죄는 ‘No’로 표시한 후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종교개혁과 예수 그리스도     


  유다 공동체에 만연되어 있던 통혼 문제는, 그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안에도 교묘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밀하게 즐길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와 다르게 그것이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한탄 속에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한탄 끝에 그 답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답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 7:25).     


  우리가 살펴본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은 모두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죄 문제를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지워나가는 일은 그분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하여 서로 섬기기만 하면 함께할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우리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주님으로 바꾸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개혁의 필수 조건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충족된다는 의미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이런 기회를 다음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외면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의 마음과 삶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해야 합니다.     

이전 09화 백성들의 ‘통혼’과 에스라의 반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