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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9. 2022

백성들의 ‘통혼’과 에스라의 반응

성전 재건과 종교개혁 9

본문|에스라 9: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접한 에스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 문제가 너무 어렵다면서 답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다양하게 또는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은, 아마도 두 가지가 원인이 되어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현대 산업 정보화 사회가 지닌 복잡다단한 양상이 결혼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후자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눌 내용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에는 에스라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3절). 이렇게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크게 분을 낼 만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심히 괴롭고 아플 때 하는 행동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나타납니다.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을 때, 그 사실을 나중에 안 르우벤은 슬픈 나머지 자신의 옷을 찢었고, 아버지 야곱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의 결과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창 37-29,34). 또한, 다윗의 맏아들 암논은 자기 누이인 다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정한 방법으로 누이를 범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강제로 욕을 보이는 사랑은 오래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변질됩니다. 다말을 범함으로써 욕구를 다 채운 암논의 마음은 급속하게 얼어버렸고, 급기야는 그녀를 미워하여 쫓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다말은 그의 행위에 대하여 이렇게 항의하였습니다.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네가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다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종을 불러 문밖으로 내쫓고 문빗장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러자 다말은 재를 자기 머리에 덮어쓰고 ‘채색 옷을 찢고’ 크게 울부짖었습니다(창 13:1-19).     


  에스라가 옷을 찢은 행위 속에는 바로 이와 같은 충격이 담겨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옷을 찢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까지 뜯었다는 것은, 그가 받은 충격과 그에 따른 슬픔과 분노가 형언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스라로 하여금 그런 충격과 슬픔과 분노에 빠지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통혼하여,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일에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백성들의 리더인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일에 더욱 앞장섰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1-2절).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그분의 뜻이 아닌지,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가증한 결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증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실 때 ‘혐오스럽다’라는 뜻입니다. ‘가증한 일’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우가리트어(Ugaritic語)에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사실’(taboo)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1) 섞이는 문제


  그렇다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이 왜 가증한 일일까요?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섞이면 거룩한 자손은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혼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결혼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향후 전개될 삶의 방향, 즉 신앙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결혼은, 그분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결혼하고 나서 배우자를 하나님께 인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혼과 동시에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이 서로 섞이게 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지 못하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결혼은 배우자가 될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모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주재권의 문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가증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선택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요?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그분의 눈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관자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창 1:1).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결정적 증거가 창세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와를 배우자로 삼을 때 그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혼자 사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자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실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셨습니다(창 2:18-25). 아담이 그 일에 관여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주재권을 빼앗아 인간 스스로가 결혼의 주재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그 일이 그분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또한,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결혼은 가증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기서 ‘왕이 없다’라는 문장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다윗과 같은 왕이 없다는 뜻도 있고, 왕이신 하나님이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첩을 거느리는가 하면, 그 첩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몸을 섞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그 첩을 기브아 불량배들이 능욕한 이후에 죽게 버려둔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일로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에 동족상잔의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결혼은 이런 문제와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결혼은 두 당사자가 매일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측면에서 더욱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결혼 문제에 있어서 통혼을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씀을 결혼 문제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 문제들 가운데 결혼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배우자를 선택할 때, 우리는 사사 시대의 문제들에서 벗어나 축복 가득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진노와 멸망을 향한 결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결과가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앞서 사사 시대의 예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결혼 속에는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반인륜적 범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결혼 생활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좌시하실 수 없습니다. 진노하시고 갑자기 멸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신 7:4).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결혼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결혼을 왜 합니까? 저주받고 싶어서, 멸망 당하기 원해서 결혼하나요? 그것을 원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런 소망과 달리 저주와 멸망이 결혼 끝에 기다리고 있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낭패일까요.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낭패가 우리 주변에는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이는 것을 ‘착시’라고 합니다. 오아시스를 보고 달려갔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눈에 좋게 보였을 뿐이지, 실상은 신기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기루만 보는 우리의 눈이 아니라,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필요하고, 그 눈에 의지해서 결혼 문제를 결정해야 합니다.     



  올바른 결혼     


  우리는 본문에서 통혼 문제에 각기 다르게 반응한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그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쪽은 그 문제를 지적한 방백들과 또 그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에스라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문제 앞에서 어떤 반응을 하고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가 후자의 모습을 하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랴”(고후 6:14). 그렇다고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와 관계까지 끊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하여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고(레 19:18), 주님은 더 나아가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2).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거룩’과 직결되어 있고, 동시에 믿지 않는 사람과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은 ‘거룩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결혼해서 이룬 가정이 맺게 될 이웃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인 결혼은, 우리의 모든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혼이 거룩하게 유지되기를 원하십니다. 동시에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함께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또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아가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을 파괴하는 통혼 앞에서 거룩한 분노가 일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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