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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택 Oct 27. 2022

에스라의 세 가지 ‘결심’

성전 개전과 종교개혁 7

본문|에스라 7: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7 아닥사스다 왕 제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 년 다섯째 달이라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의 귀환 배경     


  1-6장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 즉 1차 포로 귀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주도로 올라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2차 성전을 지었습니다. 뒤를 이어 7-10장은 2차 귀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차 귀환을 주도하였던 사람은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입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도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의 조서에 보면 그가 돌아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그에게 이와 같은 임무를 맡겼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둘째, 하나님의 전(성전)을 위하여 (제사로) 섬기라(17-20절). 셋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라(25절).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임무가 맡겨졌다는 것은, 역으로 당시 그곳에 그와 같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였고, 그나마 드리는 제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법관과 재판관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의해 공정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졌을까요? 백성과 지도자들(특히 종교와 사법 분야)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곳의 형편을 살펴서 정상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겠다”(10절). 에스라가 결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의 결심 세 가지     


  (1)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


  에스라가 맨 먼저 결심한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6절). 하지만 그는 이것뿐만 아니라 ‘시가서’를 비롯하여 에스라 이전에 쓴 ‘역사서’와 ‘예언서’ 일부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하다’라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6절). 여기서 ‘익숙하다’라는 말은 ‘숙련되다’(RSV, NASB, skilled), ‘박식하다’(NEB, learned), ‘정통하다’(NIV, well versed)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익숙함에 대하여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연구를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스라와 비교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연구는커녕 읽는 것조차 소홀히 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에서 돌이켜 에스라처럼 연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연구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에스라가 결심한 그다음 내용인,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과 ‘여호와의 율법’이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씀을 소홀히 대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이고 자기기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소홀히 다룰 수 있을까요?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또 그가 당부하는 말도 열심히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지 않다면, 먼저 이 문제부터 자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척도가 낮다면, 그분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 공부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다윗 왕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2) 말씀대로 준행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두 번째 내용은 무엇일까요? 열심히 연구한 말씀대로 힘써 준행하는 것입니다. ‘준행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율법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통해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한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준행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14,17-22).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 앞에서 비치는 빛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모습이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가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준행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3) 백성들에게 가르치기


  에스라가 결심한 마지막 내용은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당시 그곳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게 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께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재판관들이 사회 정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되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정답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행 20:18-20,34-35).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이 없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범사에(항상) ‘모본’을 보였습니다. 장로들은 그 모든 모습을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대하고, 그래서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以不如一見)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육에 있어 모본의 파괴력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본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은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면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자괴감에 빠지게 되므로 전보다 못한 결과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결심한 것을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결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도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성경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에서 벗어나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에스라의 결심이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 안에 거하면서 그 결심이 많은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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