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안 보여?

초딩의 일기장 02

by 박준택


금요일 저녁입니다. 퇴근하고 아들 서현이와 우리집에서 다 같이 자는 날입니다.


주말부부인 우리 가정은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가장 신나는 날입니다. 뿔뿔이 흩어졌던 온 가족이 한데 모이는 날이니까요. 그런데, 오늘은 아내가 대전에 일이 있어 올라오지 못한다고 하네요. 상봉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아들 녀석이 있으니까 그래도 남자들 둘이 신나는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먼저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배부터 채우기로 하였습니다. 아들 녀석과 눈빛을 마주치면서 동네에서 통닭을 제일 맛있게 튀기는 치킨집에 배달을 시켜 먹기로 하였습니다. 아들이 주중에 거주하는 외할머니 집에서 나와 우리 아파트로 가는 도중에 그 집 간판에 있는 전화번호를 외워 집에서 전화하기로 하였습니다. 아들보다 아이큐가 떨어지는 아빠는 국번을 외우고, 아이큐가 10 정도 높게 나오는 아들은 국번 뒤의 전화번호를 외우기로 하였습니다.

네온 불빛이 빛나는 통닭집 간판이 있는 10m 전방에서 “서현아, 너는 뒤에 있는 번호 외워!”라고 말하면서 내가 외워야 할 국번을 잽싸게 외웠습니다.
“서현아, 다 외웠지? 이제 가자.”
그런데 이 녀석의 반응이 조금 이상합니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간판을 계속 쳐다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서현, 왜 그래? 숫자가 잘 안 보여?”
2m 정도 더 앞으로 가서도 녀석의 행동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약간 불안한 느낌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2m 더 앞으로, 또 2m 더 앞으로. 그래도 녀석에겐 그 숫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가 봅니다.
“뭐야 박서현, 저게 안 보여?”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큰소리로 꾸중하듯이 나무랐습니다.
“이 녀석 보게. 저게 안 보인단 말이야? 저게 안 보이면 어떡해!”
소리 지르고 난리법석을 피우면 아들 시력이 돌아오나요? 녀석의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습니다. 간판 코앞까지 가서 겨우 전화번호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길래 TV 보지 말고 컴퓨터 게임도 조금만 하라고 했잖아.”

할머니가 주중에 아들 녀석을 봐 주면서 얼마나 예뻐하셨을까요. TV를 봐도 컴퓨터 게임을 하여도 크게 개의치 않고 손주 녀석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온전히 봐주셨겠지요. 때로 과하다 싶으면 꾸중하기도 하지만 외할머니께서 매를 들겠습니까, 아니면 추운 겨울날 윗옷을 벗겨 대문 앞에 세워두기라도 하셨겠습니까. 그렇게 대하는 할머니의 경고가 녀석에게 제대로 먹히기나 하였겠습니까. 순종하기보다는 할머니에게 떼쓰거나 대들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박서현, 이제부터 TV와 컴퓨터는 금지야. 이거 어기면 아빠한테 종아리 열 대씩 맞을 줄 알아. 알았어? 너 그러다가 시력을 모두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눈을 부라리고 화난 목소리로 협박하는 아빠에게 우리 아들 오늘 완전 주눅이 들었습니다.
“알았어, 몰랐어?”
“알았어요, 근데 숙제할 때도 컴퓨터 쓰면 안 돼요?”
아들 녀석의 목소리가 다 죽어가네요.
“그건 돼. 그리고 가족 모두가 꼭 함께 봐야 할 TV 프로그램은 봐도 돼. 약속한 거야? 어기면 종아리 열 대?”
이제 녀석은 잘못할 경우 약속한 매에 대해서는 반드시 집행하는 아빠의 기질을 잘 알고 있으므로 쉽게 어길 수 없을 것입니다.




“아후~, 심심해. 아빠 심심해 죽겠어요. 뭐 재미있는 거 없어요?”
TV에서 재미있는 만화영화도 보지 못하고 컴퓨터 게임도 하지 못하게 되니까 온몸이 뒤틀리는가 봅니다.
“아, 심심한 거 정말 싫어. 아빠아~”
“아들, 심심한 게 좋은 거야. 심심하면 책도 읽을 수 있고 얼마나 좋으니.”
사실 말이지 아들 녀석에게 TV 금지령을 내려놓고 보니까 제가 더 죽을 지경입니다. 금단 현상이 서서히 머리를 디밀고 올라옵니다. 몸이 비비 꼬이기 시작하고요. 그렇다고 내가 먼저 “야 서현아, 우리 있잖아, TV 딱 30분만 볼까? 그리고 그다음부터 영원히 안 보면 되잖아. 그치?” 이렇게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뭔가 방법을 찾기는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둘이 몸을 뒤틀다 녀석의 표현대로 둘 다 죽어버리면 어떡합니까. 생존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런데 심심함을 해결할 방법이 딱히 없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책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서현아, 넌 계속 심심해라. 난 책이나 읽으련다.”
“난 책 읽기 싫어. 아빠 나 컴퓨터 쪼금만 하면 안 되지요?”
“너 주으글라고~ 콱!”
“알았어. 안 하면 될 거 아니에요. 뭘 그런 걸 갖고 화내고 그러세요.”

그렇게 자의에 의해 몸이 뒤틀리는 고문을 일주일간 받았습니다. 녀석과의 약속 때문에 주중에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나도 TV를 보지 않고, 아들도 외할머니 집에서 학원 다녀온 후로 TV를 보지 않고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다 보니까 서서히 고문에 몸이 익숙해지네요.




또 금요일 저녁입니다. 오늘은 아내가 저녁에 올라올 수 있다고 하네요. 광명역에서 아내를 픽업해서 집으로 왔습니다. 닭갈비로 세 식구가 외식하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아, 피곤해!” 하며 소파에 드러눕더니 리모컨으로 TV를 켰습니다. 자주 보는 홈쇼핑으로 들어간 것이지요. 순간 응접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이 소리를 지릅니다. “엄마, TV 보면 어떡해요. 아빠하고 나는 TV를 안 보는데.” 아내는 “어, 그래? 맞아, 엄마가 깜빡했네. 미안해. 어이구 우리 아들 야무지네. 이제 다 컸네, 다 컸어.” 하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아들을 안고 녀석의 엉덩이를 팡팡 두들깁니다.
“우리 식구 모두 책 읽자!”

집사람은 소파에 앉아서 「샘터」를 읽고, 저는 오십견 비슷한 게 있어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두 다리는 소파에 올려놓은 채 누워서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읽고, 아들 녀석은 내 배 위에 한쪽 다리를 걸치고 소파에 기대어 「톰 소여의 모험」을 읽습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TV 없이 책을 읽으면서 저녁 시간을 채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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