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의 일기장 03
“서현 아빠야, 이것 좀 봐라!”
저는 퇴근하면 꼭 서현이 외할머니 집에 들릅니다. 아들 녀석과 한두 시간 정도 숙제를 봐주거나 놀아주기 위해서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중반 이후부터 외할머니가 녀석의 숙제를 도와주기가 만만치 않아 제가 매일 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화, 목, 금요일에는 영어학원 갔다 집에 들러, 씻고 저녁밥 먹고 외할머니 집에 가게 되면 밤 9시가 넘어갑니다.
외할머니가 건네주신 것은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치른 수학 시험지였습니다. 빨간 색연필로 크게 동그라미가 5개, 빗금이 5개 보입니다. 순간 제 눈에 색연필보다 더 시뻘건 핏발이 유리창에 거미줄처럼 금 가듯이 쫙쫙 갈라섭니다. 반타작, 그러니까 숫자로 하면 50점이네요. 절망이 깊어지면 분노가 일어나나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두 주먹에 헐크 같은 힘이 들어갑니다. 그것을 맞으면 아들 녀석 두 번 다시 못 일어나겠죠? 그렇다고 “이놈의 시키가, 이걸 점수라고!” 이렇게 쏘아붙일 수도 없고.
강남이나 목동에서는 3학년이면 5~6학년 과정을 선행 학습한다고 하는데 우리 아들은 해당 연도 학습 과정도 겨우 절반 정도만 소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 왜 이러한 재앙(?)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빠 엄마 닮았으면 최소한 90점 이상은 맞아야 정상일 텐데요.
그래도 녀석의 장래 희망은 과학자입니다. 과학자가 된 후에 돈 많이 벌어 아빠 엄마 늙으면 하루에 용돈으로 1억씩 주기로 약속한 녀석입니다.
“과학자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공부는 하지 않고 '노는 게 제일 좋아' 하면서 뽀로로처럼 노래 부르는 녀석입니다. 자기는 놀아도 공부에는 자신 있다나요. 나 원 참! 수학 50점 맞는 과학자 보셨나요? 말년에 좀 편하게 살려나 했는데, 기대 수치를 한참 낮춰야 할 것 같습니다.
냉장고로 가서 얼음물을 두 컵 마시고 불길을 삭이며 녀석에게로 갔습니다.
“괜찮아 서현아, 그래도 절반은 맞았잖아? 잘했어 잘했어.”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장면이 생각나 그렇게 폼을 잡아 봅니다. 오늘 서현 아빠 완전히 멋진 아빠 되네요.
“아빠 아빠 있잖아요, 이번 시험이 조금 어려웠는데, 절반도 맞지 못한 애들이 몇 명 더 있어요.”
‘으이그, 그걸 말이라고.’ 머리끝에서 불길이 다시 활활 타오르려고 하네요.
“우리 서현이 어떤 걸 틀렸나 볼까?”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풀 수 있는 ‘1,527+538=’ 같은 문제는 다 맞았네요.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야 하는 문제는 죄다 틀렸습니다. ‘어느 문방구에 볼펜이 631자루, 사인펜이 412자루 있습니다. 오늘 볼펜을 255자루, 사인펜을 124자루 팔았습니다. 볼펜은 사인펜보다 얼마나 많이 남아 있습니까?’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죄다 틀렸으니 화가 날 만하지요?
녀석의 수학 문제집을 갖다 놓고 해당 단원을 처음부터 찬찬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학습 기초와 개념 등을 익힐 무렵 녀석이 하품하기 시작합니다. 몸을 배배 꼬기도 하고 어깨며 배를 박박 긁기도 합니다. 코를 후비다가 후빈 손가락을 제 입에 넣고 빨아 보기도 하고요. 학습 태도가 점점 더 흐트러집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밤 열한 시가 다 되어 가니까요. 외할머니는 "나 먼저 잔다" 하시면서 먼저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아빠, 졸린데 내일 하면 안 돼?”
“너 지금 그런 말이 나오니? 나 같으면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잠도 안 오겠다.”
“왜 그거 갖고 분통이 터져야 하는데요?”
‘근데 이놈 자슥이, 계속 성질 건드리네. 콱 한 대 맞으려고.’
“암튼 빨리 풀어. 딴소리하지 말고.”
“괜히 그래.”
아빠는 유형 문제, 심화 문제, 단원 평가 문제 등을 설명해 주고, 아들은 계속해서 풉니다. 단원 평가 문제를 절반 정도 풀 무렵에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나 봅니다. 불만이 터져 나오네요.
“아빠, 이제 그만 자요. 열두 시잖아요, 열두 시!”
“안돼, 오늘 단원 평가 문제까지 다 마쳐야 돼.”
“아빠, 아들을 너무 혹사하는 거 아니에요? 나 사랑하지 않죠?”
“그래, 사랑 안 해. 이거 다 끝내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거야.”
“아빠는 사랑도 조건이 붙어요? 하나님이 그러라고 시키셨어요?”
‘말이나 못하면......’
“하나님도 오늘은 아빠와 똑같은 마음을 갖고 계실 거야. 그리고 오늘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야.”
열두 시 반. 이걸 밤이라고 해야 하나 새벽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튼, 늦은 시간입니다. 오 분 거리에 있는 우리집으로 가는 길에 3월인데도 아직은 바람이 제법 매섭네요. 얇고 넓은 소매며 바지 밑단으로 들어온 바람이 사정없이 치고 올라오지만, 왠지 추운 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 콕 박혀 있는 녀석의 따스한 온기가 두툼한 내복처럼 나를 두르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