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의 일기장 04
“서현아, 오늘 회사 일이 바빠서 저녁 9시에나 들어갈 것 같아.”
“네, 알았어요.”
“아들, 아빠 들어가기 전까지 숙제 다 해 놔야 해?”
“......”
“알았니? 왜 대답이 없어?”
“숙제 다 해 놓는 대신 배드민턴 치기 해야 해요?”
“평일 밤에 무슨 배드민턴이야? 노는 건 주말에만 하기로 약속했잖아.”
“암튼, 제가 숙제를 다 해 놓는 조건이에요.”
“그래, 알았어.”
마음씨 곱고 여리기로 소문난 서현이 아빠, 늦게 들어가는 것이 미안해서 아들이 제시한 조건대로 하기로 약속해 버렸습니다.
일주일 전 주말 밤에 아파트 앞 목감천으로 나갔습니다. 아들이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해서 야심한 시간에 나간 것입니다. 녀석은 자전거를 타고 저는 그 옆에서 뛰며 왕복 2km 정도 코스를 완주하였습니다. 갈대 비슷한 잡풀들에서 일어나는 향기가 초여름 냇가 바람에 섞여 아들과 아빠 사이로 싱그럽게 물결쳐 옵니다.
운동 기구가 마련된 공터에서 운동을 마무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누나들이 배드민턴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눈에 그것이 좋아 보였던지 자전거를 바닥에 획 내던져두고 부러운 듯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길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외칩니다.
“아빠, 배드민턴 사 주세요!”
초등학교 삼학년이나 되는 녀석이 아직도 돈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팔만 원이나 주고 자전거를 사 주었는데 일주일도 안 되어 배드민턴 채를 사 주라고 하니, 아빠가 무슨 돈을 넣어 두는 은행입니까? 그래도 어떡합니까, 아들이 원한다면 천하라도 다 사 주고 싶은 게 아빠의 마음 아닌가요.
“대신, 평일에는 절대 배드민턴을 칠 수 없어. 평일에는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하고. 약속할 수 있어?”
그 약속을 오늘, 아들이 숙제를 다 해 놓는다는 조건으로 아빠가 먼저 깨뜨린 겁니다.
“아빠, 빨리 나가요.”
퇴근해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들 녀석이 다그칩니다.
“뭘? 어딜 나가?”
“배드민턴 치러! 아까 약속했잖아요.”
“이런 녀석을 봤나, 아빠는 아직 저녁밥도 안 먹었잖아. 간단히 씻고 옷 갈아입고 밥 먹고 나가야지.”
“그냥 빨리 나가자니까요!”
역시 우리 아들 우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누구를 닮았을까요?
“이 녀석 보게. 아빠가 아직 식사도 안 하셨다고 하잖니!”
옆에 계신 할머니가 벼락같은 목소리로 저를 도와주시네요. 서현이는 할머니의 말을 무서워합니다. 할머니의 성격이 워낙 불같고 강단진 데다가 말을 안 들으면 눈을 부릅뜨며 충청도 욕까지 한 방 날리기 때문입니다.
한 번 놀기 시작하면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끝장 보고 마는 우리 아들의 기질을 잘 알고 있기에, 또 오늘은 종일토록 업무에 치여서 심신이 피곤함에 절어 있기에, 아빠가 먼저 선수를 칩니다.
“오늘은 열 시 반까지만 배드민턴 치는 거야!”
할머니는 옆에서 아빠보다 더 센 펀치를 날립니다.
“열 시 반은 무슨 열 시 반이야. 열 시까지만 해! 늦게 자면 내일 아침 널 어떻게 깨우니!”
‘야호, 우리 할머니 멋쟁이!’
아빠는 샤워를 여유 있게 하고 반바지와 반소매 티를 느릿느릿 우아하게 갈아입고 밥과 반찬은 꼭꼭 씹어서 그 깊은 맛을 최대한 음미하며 목 안으로 넘깁니다. 그런 아빠를, 아들은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십칠 대 오십삼!”
아빠가 이기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점수 차이로. 그래도 아들은 운동 천재이자 팔팔 꿈나무였던 천하무적 아빠를 상대하여 십칠 점이나 따낸 자신이 자랑스러운가 봅니다.
“오늘은 제가 아빠를 봐주는 거예요. 아들이 아빠를 이겨버리면 안 되잖아요? 진짜 내 실력을 발휘하면 어림없어요.”
실력으로 지고 있어도 입으로는 아빠를 이기고 있네요.
십칠 점도 사실은 녀석이 우겨서 올려놓은 점수입니다. 녀석은 공을 치기만 하면 점수로 인정해 버립니다. 녀석이 친 공이 자신의 뒤로 떨어지고 옆으로 떨어지고 바로 코앞으로 떨어지는데, 제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넘깁니까? 그리고, 아들이 서브 넣을 때 자신이 치지 못하고 땅바닥에 떨어뜨린 것까지 합하면 점수 차이가 이백 대 삼 이상은 될 겁니다.
밤은 점점 깊어 달도 지쳐갑니다. 아들은 땀에 온몸이 젖은 채 야구 방망이 휘두르듯 배드민턴 채를 돌리고 있고, 아빠는 별로 힘들이지 않은 탓에 차가워진 밤공기에 추위를 느끼며 떨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경비실 옆 가로등이 어둠을 힘겹게 밀어내면서 불빛을 비춰 주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