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종 인간

유아 일기장 13

by 박준택


놀이터나 슈퍼에 가면 아파트에서 오가며 눈인사하던 아줌마들과 자주 마주칩니다. 그럴 때면 으레 육아에 대한 정보나 남편 헐뜯기, 아파트값이 올랐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나 늘 이야기의 중심은 아이들 교육에 집중됩니다. 누구 집 아이가 다섯 살인데 한글을 다 떼었다고 하더라, 어느 학원이 싸고 잘 가르친다고 하더라, 수영은 어디가 제일 잘 가르친다더라, 몇십만 원짜리 동화책을 샀는데 정말 좋다고 하더라 등등의 근거 없는 “~하더라” 식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얼마 전 우리 집에 이제 삼십 개월 정도 된 이슬이 친구가 놀러 왔는데, 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1층, 2층, ......24층” 하면서 1부터 24까지를 그 짧은 시간에 다 읽는 거지 뭡니까. 우리 이슬이는 겨우 다섯까지밖에 모르고, 하나, 둘, 셋밖에는 모르는데 말이죠.


늦게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는 저로서는, 이미 아이들을 키워 본 선배 엄마들의 이야기에 저절로 귀가 솔깃해집니다. 솔직히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빠르게 뭔가를 알고 있는 녀석들을 만나면, 부럽기도 하고 뭔가 알 수 없는 불안한 마음도 듭니다.


이슬이는 만 이십구 개월이 되었는데도 엄마랑 종일 달라붙어서 밀가루 반죽을 떼거나 그림을 그리며 놀고, 엄마가 학교 갈 때는 외할머니랑 놀이터에서 흙장난하며 놉니다. 우리 이슬이가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놀고 있다고 하면, 다른 아줌마들은 저를 무슨 별종 인간으로 봅니다.

“아휴, 지금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만 있으면 어떡해! 학습하는 습관을 길러 줘야지. 아이 하나밖에 없는데 투자 좀 해! 책도 좀 사 주고!”


사실 말이지, 우리 이슬이는 책도 다 낱권으로, 그것도 출판사에 다니는 제 아빠가 주워다가 준 것들과 제가 친구들에게서 얻어 온 몇 권밖에 없습니다. 옷도 돌 이전이나 돌 이후에나 늘 얻어다가 입히고, 심지어 장난감은 재활용품 버리는 날 주워다가 깨끗하게 씻어서 갖고 놀게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저 자신이 비참해지고 이슬이가 참 안됐다 싶기도 합니다. 사실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아이가 금방금방 크기 때문에, 새것 사 주기 아까워서’라고 말하기는 하지만요.




그렇지만, 이슬이는 누구보다도 건강하고 야무지고 똑똑하게 잘 자라고 있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도 건강하게 잘 놀고 잘 커가는 이슬이를 보면서 오히려 저 자신이 많이 반성하였습니다. 우리 이슬이가 결코 다른 집 아이들보다 지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뒤처지는 것이 없는데도 왠지 불안해하고, 이슬이에게 좀 더 좋은 것을 채워 주지 못하는 것으로 속상하기만 하였던 옹졸한 저 자신을요.


손때가 묻고 너덜너덜하여진 책을 들고 다니면서 뭐라고 뭐라고 하면서 그림만 보고도 상황을 이해하고 잘 설명하는 이슬이. 비록 수영장이나 놀이시설에 안 가도 씩씩하게 잘 크는 이슬이. 한글도, 영어도, 숫자 세기도 잘하지 못하는 이슬이지만, 우리 이슬이를 다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 주면서 건강하게 키워야겠다고 저 자신을 추스릅니다.


동네 선배 아줌마들의 쓸데없는 이야기에 더이상 마음이 흔들리거나, 이슬이가 싫어하는데 녀석의 코를 꿰 가지고 시키는 일은 안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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