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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Mar 24. 2016

#3 - 나를 기다린다

운명 뒤에 숨기엔 당신이 너무 아름답다.

다음주에 잡혀있는 미팅과 소개팅은 취소할까 생각 중이다. 보나마나 이번에도 어색하게 마주 앉아 남자가 사는 밥을 먹으며 서로의 스펙을 티나지 않게 자랑하고, 내가 사는 차를 마시며 애프터의 신경전을 벌일 것이다. 헤어지면, 어느쪽이든 메세지 차단을 누를게 뻔한데 애초에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다. 소개팅, 미팅이라면 이제 물리려고 한다. 따뜻한 봄볕을 사무실 안에서 바라 보기만해야 하는 게 안타깝지만 그런대로 혼자만의 낭만을 가지면 된다.    


깨끗한 하늘, 사랑하는 그와 손만 잡고 걸어도 내일이 없을 것만 같은 예쁜 봄이다. 예전에 그와 집 근처에서 파스타를 먹고 호수 근처를 걸었던 생각이 난다. 지나가던 강아지와 아기를 보며 웃는 나를 보던 너는 어떤 표정이었을지 상상해보다 청승은 이제 그만 떨기로 마음을 먹는다. 역시나 고통스러운 이별의 후유증으로 길에서 멜로 영화도 찍어보고, 취중에 보낸 문자 메세지로 드라마도 찍어보고, 맛집 탐방과 워커 홀릭으로 살며 2년을 흘러 보냈는데, 아직도 이러는 건 너무 우스운 꼴이다. 그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고, 더 이상의 눈물은 내 운명이 비웃기에 딱이다.     



“야 그러지 말고 한번 만나봐. 너가 찾는 매력남이라니까.”  

“이제 안 할래. 소개팅 지겹다~ 어디서 만나겠지 뭐. 그리고 이번주부터 B랑 공인중개사 시험 공부 시작하기로 했어. 바빠서 시간이 안될 거 같아. 무튼 고마워.”  

“퇴근 후에? 너무 힘들지 않아?”  

읊어주는 상대남의 스펙을 듣고 있자니 솔깃하지만 그동안 속은 걸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체념한다. 친구가 주선해준 소개팅만 벌써 세 번째. 항상 먼저 생각해주는 게 고맙기도 하지만 저번엔 내가 얘한테 이정도 밖에 안되나 싶어 화가 치밀어 올라 다신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인연은 어디서든 만날거라 생각하며 단칼에 거절했다.  

회사에 입사를 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줄어들고, 시간도 사라진다. 그나마 희망은 소개팅과 미팅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말뿐 아니라 점심시간에도 짬을 내어 전부 만나보았다. 그리고 역시 쌓이는 건 지갑 속 커피값 영수증뿐이었다. 나의 적당한 학력과 연봉, 나쁘지 않은 외모에 무난한 성격은 감사하게도 상대 남자들에게 언제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충분조건이 되었지만, 역시나 내가 문제다.      



퇴근 후 돌아온 집에 불을 켠다. 타닥. 날씨가 포근해진 덕분에 집이 훨씬 덜 썰렁하다. 저녁을 먹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요거트에 딸기를 몇 개 씻어 넣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힘이 나는데, 어차피 딱히 힘을 쓸 일이 없다. 샤워를 마칠 때까지 조용하던 핸드폰이 메시지 알람을 울린다. 알림음만 듣고도 발신자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3, 4년 만에 옛애인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는 마음은 어떤 걸까. 심장이 내려 앉는 느낌일까, 덤덤할까? 가끔 헤어진지 2년이 지난 X남친에게서 오는 문자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방금은 내일 스터디를 같이 할 B의 문자일 것이 분명했다.  


세 번의 소개팅을 시켜준 친구A와 스터디를 함께 하는 친구B까지 우리 셋은 중학교 시절부터 여사친(여자사람친구), 남사친(남자사람친구)에 불과한 단짝이다. 남녀간에 우정은 없다지만 이들과는 죽을 지언정 손잡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관계의 발전은 없을 거라 감히 확신한다. 스터디 진행 장소, 시간, 대략적인 계획을 상의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업무를 마치고 B가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한 저녁 7시, 처음 보는 외제차가 내 앞에 정차했다. 차에는 문외한인 나지만 벤츠 마크가 박혀있는 게 외제차인 것 정도는 안다. 분명 B의 차가 아닌데 내 앞에서 창문이 내려간다.  

“S씨 맞는 것 같은데. 타세요~”  

립스틱을 방금 새로 고쳐 발랐음에 다행으로 생각했고, 조수석과 뒷좌석을 잠깐 고민하다 그래도 조수석에 올라탔다. 순간 차 안에서 담배 냄새가 심하게 난다.  

‘내 타입은 아니군.’    


“아아. 같이 온다고 했던 분이시구나. 제 친구는요?”  

물론 내가 이 남자의 타입도 아닐 것이다.    


“B는 먼저 스터디 카페에 가 있겠다고 했어요. 거기 걔네 집이랑 가깝잖아요. 오는 길에 S씨 데리고 오라고 하던데. 근데 좀 놀라신 것 같네요.”  

“아 괜찮아요. B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혼자 오셔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말끝을 흐렸다. 약간 낯을 가려 초면인 사람에게는 퉁명스럽게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마무리가 부드럽게 되었다. 친구에게 문자해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바빠서 말해주는 걸 잊었나 싶어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얼마전 했던 소개팅 상대남이 생각났다. 처음 만나 스테이크와 와인을 먹었다. 부담스러웠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갈 때 얻어 탄 BMW 2인승 스포츠카는, 나는 도대체 이분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라는 고민을 강요당하기에 충분했다.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하기 보다 세상에나 이렇게 좋은 차에 두 명 밖에 탈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며, 또 메시지 차단을 눌렀다.

물론 그 남자 때문에 무조건 외제차를 몰고 오는 사람에게 반감이 생긴 건 아니다. 딱히 대화 할 주제도 없었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말없이 스터디 장소에 도착했다. 자연스럽게 주차를 했고, 짐을 챙겨 들어 동시에 차에서 내렸다. 아마도 서로의 실루엣을 훑었을 것이다. 키가 커 보였고, 오랜만에 꺼내 신은 하이힐도 다행으로 생각했다.    


수요일 퇴근 후와 일요일 저녁에 함께 모여 공부하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 주자는 것이 모임의 목적이었고 나도 동의했다. 음료는 각자 주문하여 자리 앞에 두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내 친구가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벤츠남과 친구B는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나와 B는 중학교 동창으로 소개했다. 동갑인데 외제차를 몰고 다니는 것이 잠깐 부러웠지만 차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곧 공부에 몰입했다.  

말없이 두 시간 넘게 공부에 집중했다. 맛있는 야식을 먹어야 스터디의 완성이지만 감기 기운이 있어 다음에 먹자고 이야기 한 후 정리했다. 집에 돌아올 때는 B가 바래다 주었다. 헤어질 때까지도 벤츠남의 옆모습까지만 볼 수 있었다. 정면 모습은 어떨지 궁금했다. 뭐 차차 알게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싶다가 이내 잠이 들었다.      



두 번 째 스터디가 있는 일요일 저녁.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카페에 먼저 와 자리에 앉았다. 카페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차지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앉아서 핸드폰에 빠져들었다.  

“안녕하세요.”  

헛기침 후 들리는 목소리가 가까워 나에게 하는 인사구나 알아차린다. 그 벤츠남이었다. 얼굴을 마주본 건 처음이다. 조그만 얼굴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턱라인, 붉은 끼가 있어도 티없는 피부, 아마도 쌍커풀은 없지 싶다. 무엇보다 코가 알맞게 크고 매끈하다. 얼마동안 내 눈이 그의 얼굴에 머무른 걸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오늘 B는 못 온다고 하던데, 말하던가요?”  

“네?”  

그렇다. 예상은 했지만 너무 유치한 장난이다. 얼마전부터 A와 B가 만나보라던 그 사람이 이 벤츠남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본다. 이런 장난을 당해본 적이 없어 꽤 당황스러워 얼굴이 붉어졌지만 공인중개사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아 일단 스터디를 진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장 녀석들에게 메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있을 리가.    



그와는 약간 떨어져 앉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끔 들었다 내려놓고 마우스를 딸깍이고 자판을 두들기는 손가락이 가끔 보인다. 남자다운 손, 내가 좋아하는 손이다. 나는 요거트를 주문했다. 먹을 때마다 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게 여간 불편하다. 그는 공인중개사 공부가 아니라고 했는데 무얼 하는 건지 새삼 궁금하던 참에 갑자기 나를 쳐다본다. 깜짝 놀라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그는 금새 달려가 새 숟가락을 가져다 주었다.  

“공부 잘 되세요?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올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함께 카페를 나섰다. 완연한 봄은 아니기에 저녁 8시는 어둡고 쌀쌀하다. 흡연을 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고 네온사인 앞에 서서 서로의 그림자를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떤 공부 하세요? 책이 없는 걸 보니 공인중개사 공부 하시는 것 같진 않던데”  

이번엔 내가 먼저 물어보는 게 예의인 것 같아 덤덤하게 물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석사를 마치고 막 귀국하여 일자리를 구직 중 이라고 말했다. 나와 같은 공대를 전공했다기에 수학 따위의 단어로 겨우겨우 침묵을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전히 하얗고 예쁘네요. 나는 S씨 많이 봤는데, 혹시 저 기억 안 나시려나.”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사인가. 평소라면 박장대소를 했을 텐데, 왜인지 나도 한껏 진지하고 싶다. 오랜만에 듣는 적나라한 칭찬에 놀라 그를 쳐다 보았고, 그도 나를 눌러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했으면 벌써 도망갔을 단어들에 두근거리는 건, 역시 잘생긴 외모 덕분 일까, 허세 없는 목소리 때문일까, 그냥 벤츠일까. 바람을 쐬자더니 그는 준비한 말들을 이야기할 시간이 필요했나 보다.  


학교 운동장에서 우연히 주운 필통이 내 거 였다는 유치한 스토리라도 있을 줄 알았다. 캐나다에서 귀국하는 공항에 내가 있었다는 기막힌 우연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고 누구에게나 있는 순수한 고등학생의 추억이었다.  

그와 B가 졸업한 고등학교와 우리고등학교에서 함께 하는 농구시합에서 나를 처음 봤으며, B가 하는 경기를 보러 오는 나에게 건너건너 물을 주었다고. 축제 때마다 A가 팔고 남는다며 준 꽃다발은 그가 준 것이라고. 우리 집 근처 도서관까지 수능공부를 하러 오느라 망하는 바람에 캐나다로 도피했다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했다.    

그리고 그 때에, 우리가 고등학생이었던 그 때부터 지금 즈음에 연락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금 즈음’이라는 건 내가 이별을 한 2년 후 일까, 외로움을 특히 느끼는 봄일까, 서른을 앞두었지만 혼자인 지금 일까. 하지만 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셋 다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외제차와 순애보는 상당히 조합이 어려웠다. 더구나 한 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그의 트레이닝 바지 핏은 어느 것이 진실인지 더 어려워 지게 만드는 어울림이다. 엉망이 된 마음으로 다시 공부를 하러 들어왔고, 무엇도 들키지 않고 싶지 않아 공부에 몰입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B에게 당장 전화를 걸었다. 녀석들의 영특함이 대견했지만 그래도 화를 먼저 내는게 이들이 기대하는 캐릭터에 맞아 버럭 한마디 해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었고 들었다. 열심히 살아온 미래가 밝은 쳥년이며 무엇보다 보기 드문 ‘순수한 짐승남’이라고 했다. 짐승남.. 점점 더 마음에 든다.  

‘너 남자친구 있을 때도 계속 물어보고 그랬어. 아마 핸드폰 번호도 벌써 알고 있을걸? 이제 주제파악 좀 하고 그만 까다롭게 굴어. 하여튼 여자들은 잘해주면 고마운 줄 모르지.’  

오랜 친구다운 충고였다. 맞는 말이다.  

오랜만에 등록된 새 연락처를 한참 바라보았다. 탁해진 마음에 순수한 진심이 들어오면 그 색이 바래져 버린다. 무던하던 심장이 그의 이름 세 글자에 설레면서도 아직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오늘은 세 번째 스터디를 하는 날이다. 수요일 회사 앞 7시, 그는 늦지 않게 데리러 왔다. 이 벤츠는 여전히 부담스럽다.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앉아 출발했고 아무도 B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스터디 장소는 여기서 좌회전을 해야하는데 계속 직진을 하길래 말 없이 쳐다봤다.  

“교외에 있는 예쁜 카페를 알아봤는데, 오늘은 거기서 스터디 하는게 어때요? 불편하면 원래 하던곳에서 해도 되구요.”  

아니 오히려 좋았다. 퇴근 후 잠깐의 드라이브와 모르긴해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그리고 완벽한 계획에 마음이 편안했다. 그냥 기분이 좋아져 그가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했다.  

비트가 빠른 힙합을 틀었고, 얼마전에 그가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는 건지 그와 나의 취향이 우연처럼 맞는 건지, 아무튼 그저 이 상황이 황홀하다. 자신감 있는 말투와 모션, 단어 선택들이 그의 요즘을 표현한다. 잦은 핑계로 그의 오른손이 가끔씩 내 손에 다가옴을 눈치챈다.    

“개인적으로 문자 보내도 될까요? 스터디 말고 따로 맛있는거 사주고 싶었는데.”  

그를 향한 의심도 아주 천천히 지켜보기로 한다.       



내가 꿈꿔왔던 운명 같은 사랑은 지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나를 좋아해왔다고 말하는 그, 그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만큼 예전과 달라진 게 없는 나, 그리고 사랑이 간절한 우리의 상황까지. 그러나 난 이제 인연 혹은 운명이라는 두 음절로 설명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이 순간을 하늘이 만들어준 걸로 치기엔 그가 고민했을 수많은 경우의 수와 용기의 시간이 억울하지 않는가.   

우연을 가장한 우리의 인연을 깊은 운명으로 만드는 건 또 그와 나의 노력에 달려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를 위해 노력을 해볼까 한다.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에서 특히 공감되는 대사가 있었다.   

“운명은 그리고 타이밍은 그저 찾아드는 우연이 아니다. 간절함을 향한 숱한 선택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주저 없는 용기와 망설임 없는 결정들이 타이밍을 만든다. 그 녀석이 더 간절했고 난 더 용기를 냈어야 했다”.


글 - kyo
그림 - 정아 (인스타그램 - lint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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