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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Sep 10. 2019

Fuck It Right! & Carpe Diem

영화 '수상한 교수'


#1. 멋을 아는 키팅 교수

내용은 완벽하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계급사회에 정착한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이 시한부가 되어 인생 강의를 하는 영화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리처드(조니 뎁)가 곧장 얕은 강가에 걸어 들어가 빠지는 장면이 있다. 그러고는 “Fuck!”라고 외친다. 이것부터가 키팅 교수와 다르지 않은가.


훨씬 더 시니컬하고, 멋이 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 그가 속한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의 지위에 있을 것이다. 그는 그의 입으로도 이야기한다. 자신은 중산층의 중년이라고. 매너를 중시하는 교수 사회(영화 내 분위기가 그렇다)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회적 지위는 그 이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욕이라니, 심지어 물에 빠져들다니. 이후의 일은 더욱 코믹하다(영화로 확인하세요). 그리고 그 속에는 엉성함이 있다. 그러나 ‘엉성한 엉성함’이 아닌 ‘생각 있는 엉성함’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순대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이 순대를 조심스럽게 먹으면서 맛있다고 처음 느끼는 그런 순간이 될 것 같다. 의도치 않았지만 순대가게 사장님은 그를 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순대에 그가 지녀 온 사상들을 관철시키느라 조심스럽게 보였을 뿐인 그런 상황. 그런 *엉성함.

*애초에 순대를 먹는 데에 그 따위 류의 심오함이 필요한 경우는 잘 없으니까. 그런 어색한 신중함을 엉성함이라고 표현한 것.


*결국 그의 지위와 행위들은 충돌이 일었다. 의외로 그것은 유머러스함과 동시에, 고품격의 우아함도 갖추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멍청함과 섹시함을 둘 다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조니 뎁이 리처드라서 그랬을 수도.

*키팅 선생에게서 멍청함을 바라기란 어렵다. 대신 우리는 그런 면들을 그의 학생들에게서 얻었다. 청춘의 낭만적인 어리석음으로. 하지만 여기선 리처드가 멍청하고 섹시하고를 다 한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리처드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데에 있다. 리처드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자신이 이전에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인생에서 중요하게 다루게 된다. 아내와의 파탄난 결혼 생활, 딸과의 관계성, 그리고 대학 강단에 서는 일. 이외에도 많다.



‘다룬다’고 표현한 것은, 리처드가 지위와 교양을 위해 포기해왔던 시각을 각각의 상황에 투영하게 되어서이다. 아내와의 불화를 인정하고, 자신도 자유를 찾아 나선다던지. 뭐 이것저것.


#2. Fuck It Right!

그러한 과정에서 리처드 교수가 학생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구절이 있다. 바로 “Fuck it right!”이다. 한글로 번역하자면 ‘제대로 망치자!’ 즈음이 될 것 같다. 물론 가볍게 해석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길이 제시된다. 그 길은 우리의 경험, 사회, 부모 등에 의해 만들어진다. 대부분이 가깝든 멀든 미래를 위해 충실히 길을 걸어간다. 일면에서는 ‘정해진 길은 없다. 너만의 길을 가라’고 하지만 그것조차 길을 정해 준 것이라는 모순을 이기지 못한다. 길은 어차피 길이다.


그렇다면 ‘Fuck it right’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제대로 무엇을 망치라는 걸까. 리처드는 아주 그답게, 명쾌하게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모두를 떠난다. 그리고 가던 길에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그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냥 길이 아닌 풀 밭으로 계속해서 운전해 간다.


어디를 가던 길이 되게 되어 있다. 포장도로라서 안정된 것도, 비포장 도로라서 쿨한 것도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 솔직해지는 것.


리처드가 풀 밭으로 들어가서 완벽히 결말을 내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시 차를 끌고 갈림길 중 하나로 돌아갔을 확률이 높다. 우스꽝스러워도 솔직하다.


우리는 가끔 막연하게 두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만든 교양과 멋이라는 기준이 한몫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멋이 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완벽하게 치장을 하는 것이 멋이라고 느끼지 않기에.


실패할 수 있다. 돌아올 수 있다. 그리고 흑역사도 만들 수 있다. 뭐가 더 있을까. 가끔은 사무치게 후회할 수 있다. 여기에서 리처드는 말한다. 그게 뭐 어때서. 당연한 거야. 더 망쳐. 이왕이면 제대로 망치라고.


우리가 탄탄하게 다져 온 사회적 이미지 등등의 것들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에 완벽함이 절대 없다는 것도 중요한 사실이다.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완벽은 없다. 애초에 죽기 전까지는 완결된 것도 없을 터이니까. 그리고 이 말은 우리가 제대로 망친 것들은 완벽하지 않은 무언가가 절대 되지 못한다는 소리와 같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고군분투하며 이뤄 온 모든 것들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완벽과, 불 완벽(imperfection)은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제대로 망친 것들은 불 완벽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좋은 자극이 될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포인트 한 가지. 망치라고 해서 해괴망측한 짓을 저지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생각 있는 엉성함’이 있어야 한다. 자아가 쓰러지지 않는.


#3. Carpe Diem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이 꽤나 여러 장면에서 웃었다. 나 또한 정말 코믹하다 느껴서 웃었다. “그렇지. 인생 또한 코믹과 막장의 연속이지’라고 생각하며.


개인과 사정에 따라 비극의 비중은 꽤나 달라진다. 하지만 비극이 실제로 우리 눈에 눈물 고이게 하는 기간은 -비율로 보자면- 점점 짧고, 옅어진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니 말이다.


영원히 눈물을 매달고 살 순 없다. 삶에는, 그리고 비극에서 조차도, 시공간이 일그러질 정도로 어색한 우스꽝스러움이 분명 들어가 있다. 그럴 때 자책하지 말고 웃으며 ‘Fuck it right’ 하면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눈치 보지 말고 비극을 벗어나면 된다. 엉성하게 선을 지키면서.

*영화 보며 느꼈던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보다 더 멋있었는데.


이런 면에서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이 ‘Fuck it right’는 키팅 교수의 ‘Carpe Diem’과도 유사하다. 잠깐 스쳐가듯이 위에서 언급했다. 키팅 교수에게 유머와 어리석음은 없다. 오로지 현명함만 있다. 그 엉성함의 부족함을 학생들이 채워주는 데, 그들은 독서 모임을 가지는 등 청춘이 가지는 열정으로 엉성하게 현실에 맞선다. 그리고 그들은 ‘Carpe Diem’을 외친다. 현재를 즐기라고. 현실(학교, 사회)이 정해 놓은 곧은 직선의 길을 무시하고 말이다. 그들이 나중에 그들 자신을 회상하며 어떤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핵심이다. 제대로 망치고 있는 것이다.



#4. 죽음

결국 영화 ‘수상한 교수’는 ‘죽은 시인의 사회’보다 훨씬 세련되고 우스꽝스러움을 연출해낸다.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죽음을 대하는 모습은 참으로 감탄스럽다.


전 세계에 있는 모두를 통틀어도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근처에 도달했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으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할 수는 있다.


일관성 있는 이야기로 자주 접한 것은 ‘후회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후회.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더라도 각자 한 번씩 뼈 저리게 후회되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죽을 때 후회를 덜 하도록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 사랑과 희생을 가지되, 이후에는 자유도 슬그머니 만끽하고. 잘 가고 있는 건지 멈칫하지 말고. 지금 일어난 감정 그대로를 인식하고. *꾸밈없이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표출하고.

*유재하의 ‘지난날’ 가사다. 실은 영화 리뷰를 안 쓰려다 곡 가사를 보고 바로 써내려 간 것이다.


어설프게 행동하다가 망신을 당해도 좋다. 그럴 때마다 영화 ‘수상한 교수’처럼, 영화의 한 장면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 여기선 관객들이 한 템포 쉬고 웃겠구나. 어차피 우리는 이미 진지하게 영화 시나리오를 꾸려왔고, 그만큼 길을 닦아왔기 때문에. 엉성하게 웃음 포인트 하나는 만들고 가도 되지 않겠나.


그렇게 모두들 ‘Fuck it right’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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