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에쿠우스'
0. 순수, 욕심, 욕구, 본능의 사전적 정의 (그리고 나름대로의 해석표)
- 순수 :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 욕심 :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
- 욕구 : 인간 개체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물(物)을 획득하려고 하는 발동력(發動力). 그것은 인간의 여러 사회적 활동을 자극하는 추진력으로서 인간의 활동의 목적을 규정하는 것. 욕구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①하나는 모든 사회의 기초에 존재하면서, 단지 형식과 방향에 있어서만 여러 가지로 변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②다른 하나는 일정한 사회구성체, 일정한 생산조건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본능 : 사람과 동물에 특유한 생득적 행동능력(生得的行動能力). 본능은 경험으로 습득할 수 없는 능력으로서 학습과 대립하여 논의되지만 실제 행동에서 본능과 학습을 구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전적 정의들을 바탕으로 내 임의대로 정리한 표이다.
<순수>란 <욕구①>과 <본능>을 포함한 집합이며, 순수가 아닌 집합들로 <욕구②>와 <학습>, 그리고 <욕심>이 있다. 이는 단순히 <순수>의 정의에 맞춘 것이다. 이때 '다른 것'이란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본성이 아닌 무언가로 간주하였다.
내 머릿속에서 짜깁기 되어 나온 분류 표이니 완벽하지는 않다.
어찌 됐든 이 글은 연극 '에쿠우스'에 관한 것이다.
극은 주인공 알런 스트랑이 하룻밤 사이에 말 7마리의 눈을 칼로 찌른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다이사트는 정신과 의사로서 알런 스트랑이 그 사건을 일으킨 원인과 과정을 나열하고 정리하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1. 알런 스트랑
주인공 알런 스트랑은 17세 소년이다. 그리고 그는 순수하다. 즉, 모든 사회에서 기초가 되는 욕구(욕구①)와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순수를 대표하는 두 가지 요소는 바로 믿음과 사랑이다. 믿음과 사랑은 선천적인 욕구이자 본능이다.
물론, 진화론의 입장에서 볼 때 상대에 대한 이타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이것들이 설명이 안 된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들 모두 진화(생존, 번식 - 자기 존재의 의미 파악까지 포함)에 직결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들을 순수로 간주하여도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심지어 알런의 믿음과 사랑은 상당히 원초적으로 표현된다. 그 대상도 무려 말이다.
(* 믿음은 생각보다 만연해 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부터 해서, '내 옆사람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까지 믿음이 없으면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자기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 그리고 인간 행위에 믿음(확신)을 가질 때 자기 존재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정확히 매슬로우 욕구 단계의 상위 3단계와 직결된다. 사랑은 의심할 여지없이 번식과 관련 있으며, 이 또한 생존과 관련된 개념이다.)
알런에게 말은 신이자, 같이 하나가 되고 싶은 대상이다. 믿음과 사랑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순수(욕구와 본능)의 표상이다. 그에 맞게 나체 연기도 극 연출로 등장한다. 이 때문에 1975년 공연 이후 외설 시비도 있어 왔지만 개인적으로 나체 연기가 없다면 알런과 말의 캐릭터가 죽는다고 생각한다.
질과 알런이 마구간에서 섹스를 가지려고 했을 때 알런이 신경 썼던 것은 말들이었다. 말들이 그의 행동을 지켜볼까 봐. 그의 행동을 말이 보는 것은 알런에게 무슨 의미겠는가. 수치심, 죄책감, 치욕스러움일 것이다. 그가 순수함을 바쳤던 대상은 여성이 아닌 말이기 때문이다. 알런의 순수를 온전히 가지는 존재는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말들과 알런의 연기가 훨씬 에로틱하다고 느껴졌다. 알런이 말을 타고 달리며 하나가 되었다고 흥분하는 그 순간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는 단순한, 일반적인 쾌락의 섹스가 아니었다. 알런만이 가질 수 있는 탐닉이었다. 알런의 흥분은 순수의 극치였다.
2. 다이사트
다이사트는 알런 스트랑을 치료하려고 하는 정신과 의사이다. 그러나 알런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회의와 슬픔에 잠긴다. 과연 알런을 치료하여 정상적인 세계로 보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정상적인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자신이 그동안 치료해 온 아이들에 대해서도 악몽을 꾸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논하며 허탈함을 가진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아이들을 치료하고, 부인과는 입맞춤조차도 오랫동안 하지 않은 체로 살아왔다. 순수를 거부하고, 그 집합 밖의 것들만을 집어삼켰단 말이다. 그러나 순수는 인간의 선천적인 것들이다. 그것들을 무의식에 집어넣고, 의식만을 행하며 지낸다고 하더라도 결국 본질은 채워지지 않는다. 이러한 그의 결핍은 알런을 치료하는 것에 대한 슬픔을 가지게 한다. 또한 부러움을 유발하게 된다.
"허기야 의사는 정열을 파괴할 수는 없지만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 정열 : 가슴속에서 맹렬하게 일어나는 적극적인 감정.
다이사트에게 알런은 정열이었다.
순수와 거리가 먼 의사는 그 극치를 무너뜨릴 수만 있다. 극치를 다시 경험하게끔 하는 능력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알런이 순수를 추구함은 다이사트와 반대 방향에 서 있는 것이었기에 알런이 뜨거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이사트 자신과는 전혀 다른, 아주 본성적인 무언가를 정신세계가 일그러지도록 탐닉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타오르는 적극성인가.
그의 무의식 중에 담겨있는 순수를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발현되지 않는 퍽퍽한 현실을 묵묵히 지내면서도 말이다.
3. 나의 결론
알런은 순수하다. 그리고 말을 대할 때의 그는 순수의 극치이다. 그 극치는 정열이다.
다이사트에게는 그 정열이 결핍되어 있다.
연극 '에쿠우스'는 내 기준 최고의 극이었다.
알런과 말들의 순수를 담아냄이 황홀했다. 서영주의 연기로 봤는데, 소년의 유약한 모습을 잘 표현해낸 것 같아 보면서 행복했다. (물론 류덕환의 알런 연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다이사트의 대사는 특유의 템포감과 빽빽함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어느 누가 해내도 감탄했을 것이다. 장두이는 감탄스럽고 멋있었다.
무엇보다도 말들의 움직임. 그에 섹시함, 경외가 묻어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대단했다.
이 극을 통해 내가 오랫동안 고민해 왔던 무언가(순수 등의 것들)를 풀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서 그런지 극에 몰입하여 보면서도, 극에서 빠져나와 배우와 연출 하나하나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에게서 알런의 순수와 정열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연기를 하면서 알런과 다이사트 등의 인물들이 가지는 감정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순수, 즉 인간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지 않겠는가.
그를 느끼자마자, 나는 극 속의 다이사트처럼 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무대의 모두가 알런처럼 순수하고 정열적으로 보였다. 언젠가 나도 알런이 되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일었다. 그것은 내 본질, 순수에 포함된 것이다. 나도 결핍되어 있나.
결론은. 연극 '에쿠우스'는 예술이다. 그 속 예술가들은 순수하다. 본능적이다. 그래서 정열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