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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Feb 11. 2020

가족이란 불편한 의무

The Meyerowitz Stories: 영화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1. 영화 소개

요새 영화 '결혼 이야기'로 핫한 노아 바움백 감독의 작품이다.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이 작품이 태어난 지는 좀 됐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와 함께 넷플릭스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 진출했다. 물론 뭐,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문제로 여러 가지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작품성이야 논란이 생겼다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았나 싶다.


요즘 영화 '결혼 이야기'에 대한 호평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나도 영화가 너무 좋았으며, 개인적으로 아담 드라이버의 빅 팬이라 그가 좋은 연기를 보여줌이 고마웠다(아,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에도 아담 드라이버가 나온다). 만약 나처럼 이 영화를 즐긴 사람이라면, 아마 영화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도 입맛에 맞을 것이다. 오히려 더 좋을지도. '마이어로위츠 이야기'가 더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결혼 이야기'가 결혼과 이혼을 겪는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는 마이어로위츠네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이라는 넓은 범위 중 자식들이 부모에 대해 생각하는 바를 다룬다.


왼쪽에서 오른쪽 순서대로 매튜, 대니, 장


대니, 장, 매튜는 마이어로위츠의 자녀들이다. 대니와 장, 그리고 매튜는 배 다른 형제들. 그리고 이들은 조각가 아버지의 회고전을 위해 모이게 된다. 이때 그들이 고질적으로 가져왔던 부모와의 관계 문제를 마주하며, 그들만의 해결법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2. 우리는...

다들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법한 문제이다. 사회적으로 부모가 어떻게 보이는지와는 관계없이, 자녀로서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는 참으로 헷갈리는 문제이다. 개인적인 인간상으로 누군가를 존경하는 것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부모가 완벽히 부합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사회적으로 명예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존경할 수 없는 부분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나라는 특히 이 문제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동방예의지국, 어른 공경의 나라에서 커 온 우리에게는 부모 말에 거역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거역하지 않기보다 그들을 어떤 여건이든 삶의 테두리 안에 필히 포함시키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만큼 갈등도 많다. 갈등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부모라는 타이틀에 어떠한 권위를 부여한다면 말이다. 그럴 때 자녀들은 갈등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갈등으로 점화된 경우 갈등을 뿌리채까지 뽑지 못한다.


3. 영화는...

영화는 상당히 영리한 방법을 제시한다. 문제 상황을 해결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성을 반영한 이야기다. 누구나 갈등은 불가피하게 가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누가 가해자고, 피해자이며, 갈등 상황 전개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일일이 따지지 않는다. 신기하게도 가족의 경우에 더더욱이 해당된다.


그렇게 문제 상황 해결보다는, (부모와의 관계성 문제로만 다뤘을 때를 말하자면 꼰대 기성세대를 바꾸기보다는), 우리가 그들에게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우리가 죄책감을 가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부담감을 뼛속 깊이 느끼지 않을 만한 적정한 선을 우리 스스로 찾아 나가려고 애쓴다.


그 방법은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음을 계속해서 인식하고, 존중과 예의를 표해야 하는 걸까?

2. 아니면, 이를 다음 순위로 미뤄놓고 내가 일궈 낸 삶에 집중해야 할까?


각자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그들이 취하는 뉘앙스는 매우 달라진다. 그리고 영화에선 표면적으로 보자면 대니와 장이 1번, 매튜가 2번을 취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아버지가 양육했던 방식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니와 장은 아버지의 애정을 받지 못한 편이다. 특히 대니는, 예술가로서의 기질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다리에 불편을 가지고 있고, 결혼생활은 실패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그가 조각할 때 아들이 옆에 같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조각품 이름을 매튜라고 지었다. 그러나 그때 같이 있었던 자식은 대니였다.


그런데 왜 그는 아버지에게 1번을 취했을까? 그러니까, 존중받지 못하면서 왜 아버지에게 부담감을 가지면서 잘하려고 했을까? 생각보다 간단하게 답을 내릴 수 있다. 그에게는 건강한 네트워크가 부모 사이에 형성되지 못했는데, 이것이 그에게 정신적인 트리거로 작용한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그러겠지만, 특히 당사자인 부모 앞에서.


애정이 형성되지 않은 가족 관계에서 부모라는 무조건적인 관계라는 틀은 굉장한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자식들에게는 무조건적인 관계를 직접적으로 경험할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무조건적이길래 가족은 친구와, 남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그렇다 보니 알맹이 없는 껍질처럼 애정 없는 가족 관계를 자신의 논리에서 이해하려 애쓰게 된다. 이것은 생존 욕구이자 인정 욕구이다. 그렇게 된다면, 대니와 같이 부모 앞에서 정신적인 트리거가 당겨진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절대 잊지 않는 것이다.


매튜와 장도 매한가지로 대니보다 스트레스가 덜하다 말하기 어렵다. 감정들은 모두 상대적이니까. 또한 어찌 되었던 영화는 대니와 매튜가 1번과 2번을 적절히 섞으려는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약간의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일 어려운 이야기 아닐까.


어떤 정신적, 신체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의 필수적인 일부분과 같던 것이 없어지면서, 트라우마 없는 나의 모습에 적응하기까지 꽤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대니 또한 영화 후반부까지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매튜와의 사건으로 인해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주체적 의견을 말하게 된다.


사실 어떤 방법을 택하던지 그 누구도 비난을 들을 필요도, 할 자격도 없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존중과 예의를 갖추되, 내 삶의 영역도 쟁취하자는 말은 생각보다 어렵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취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마음 편하기 위해 행동하는 것임을 되새겨야 한다. 가족이라는 사회 단위는 특수성을 매우 띠고 있지만, 그곳에서의 결함을 외면 혹 책임지면서까지 그 특수성을 유지할 필요는 크지 않아 보인다. 우리는 우리 개개인이 가장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존재이니 각자의 방법을 택하여 관계를 맺으면 된다. 가족을 너무 부담스럽게, 딥(deep)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당연히 이것들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4. Forgive me. I forgive you. Good bye.

사실 나는 문제를 뿌리까지 다 해결해야 하는 건 줄 알아서 항상 그렇게까지 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의식하고 있었다. 문제라고.


하지만 사람들 사이, 특히 가족들 사이의 일들은 단순하게 풀리지 않는다. 해결이 되지 않는다. 해결하려 하는 순간 가족 구성원에게 예의를 지키지 못하는 놈이 되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예외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암묵하고 그곳에서 자리 잡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가족은 정말 불편한 것이다.


참 모순적이게도, 불편하지만서도 그들은 나의 권력이 되기도, 방패막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떻게 선과 악이라고 이분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유동적인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 엄마와 대판 싸우고, 오분 뒤면 같이 왁자지껄 떠들며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같이. 변덕이라고 말하자면 변덕이겠다.


부모 자식 간 사랑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핏줄이라는 그 특수성은 그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드는 기회는 되지만, 사랑에 단계가 있다면 기본치가 높은 것일 뿐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이 세상에서 제일 스트레스받으며, 노력하고 노력해서 이어나가는 것일 수 있다. (사실 모두에게 그렇다고 본다. 가장 가까운, 그리고 애틋한, 사회생활이지 않은가.)


부모가 모든 걸 희생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할 때가 많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 그렇게 큰 무게감으로 치환될 줄 그들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았을까. 그리고 자식들은 그에 대해 매우 애틋해한다. 개인의 삶에서 중요한 알맹이가 있음에도 이러한 클리셰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모든 게 당연하지 않다. 이러한 관계가 적절한 선을 넘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서로가 그를 인지함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현실에서는 자식들이 이를 부담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부모는 나이가 들고, 나이가 들면 습관 변화가 어렵기에) 적어도 힘든 일이 생길 때 대니가 주문 외우듯이 한 말을 기억했으면 한다.


- Forgive me. I forgive you. Good bye.


아버지에게 자신은 아버지를 돌보지 않고, 간호인에게 병간호를 부탁할 것이며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지 않을 것을 말할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다 뭉개버리고 어떻게 적응하여 살지만 궁리하면 안 된다. 설령 그 문제가 심각하다면, 대니처럼 부담에서 벗어남에 용서를 구하고. 상대를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고. 정신적인 트리거를 벗어던지는 안녕을 고하자.


-

가족 영화 중 가장 현실적이다. 나중에 막판 가서 울지 않아도 된다.

제일 비슷한 영화로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이 있다. 혹여 현실적인 가족 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추천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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