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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Mar 20. 2020

정신적 불안을 가진 모든 이에게

영화 '눈부신 세상의 끝에서, 너와 나'

정신적 불안을 가진 모든 이에게

This film is dedicated to those who have been impacted by metal health concerns, suicide or grief. If you're struggling or know someone who is, you can find more resources at allthebrightplacesfilm.info.




넷플릭스에서 꽤 많은 다양성 영화들을 볼 수 있다. LGBTQ부터 소수 인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이 영화는 정신 불안, 자살 그리고 슬픔에 관한 이야기이다. 심지어 영화 끝에 나오는 사이트(위에 첨부했다.)에 들어가면 정신 건강, 그리고 자살 예방에 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원작이라고 한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바이올렛은 언니의 생일날 자살을 시도하듯 다리 위에 선다. 그리고 핀치가 그런 그녀를 발견한다. 이후에 학교 과제를 이유로 핀치가 바이올렛을 그녀의 불안에서부터 꺼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바이올렛은 자신의 불안을 인정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바이올렛의 성장도 매우 중요하지만, 핀치의 이야기 또한 주요 역할을 한다. 핀치는 어렸을 적 아빠에게 학대를 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한 상처도 있다. 가족들 모두 바쁘게 지내 스스로 육체적이든, 심리적인 상처를 다듬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방법은 어설프고 서툴렀지만 강했다.


핀치를 볼 때면 정서 불안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이 떠올랐다. 정서 불안은 최근 들어 민감하게 다뤄지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아마 둔하게 여겨져, 당연히 스스로 이 깨물고 참아야 하는 성숙함의 정도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각자 자신만의 서투른 방법으로 감정을 다뤄야 했을 것이다. 특히 슬픔, 화, 우울의 정서는 보통의 상태에서도 조절이 어려운 것이다. 그런 와중에 자주 그런 정서들을 겪고, 불안이 더해진다면 그를 완전히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핀치는 자살한다. 그는 가끔 멍해지고, 정신적으로 길을 잃는다. 그를 이겨내고자 영감을 받는 문구들을 꾸준히 메모했고, 음악을 들으며 달리기를 미친 듯이 했다. 그리고 핀치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장면으로는, '주변 장소를 헤매어 보기'라는 지리 과제를 바이올렛과 같이 하며 그녀를 불안에서 구해냈다는 것이 있다. 그의 불안에서는 깨어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가 누구보다 바이올렛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특별하다.


정서 불안의 기본적인 원료라고도 할 수 있는 우울은 긍정적인 어감으로 느껴질 수 없는 단어이다. 우울은 기분장애로, 지속적인 슬픔과 기분 저하가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수많은 우울이 있겠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정도의 우울감 혹은 우울감을 극복한 사례에서는 이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개인이 어떤 특정한 면모에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이것은 끝없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과 다름없다. 우울은 더 큰 우울을 쉽게 만든다.


핀치는 이를 충분히 겪었고, 어설픈 방법으로 자신의 우울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잠시 멀어져서 연락을 끊기도 한다. 다른 말로 잠수를 탄다. 자신이 어떻게 처음(과거에) 상처 받았는지는 이야기할 줄 알지만,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감정의 변화, 소용돌이는 정작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핀치뿐만 아니라 모든 불안을 겪는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이다. 조금씩 그 정도와 방법의 차이가 있어 각자의 이야기가 매우 다르게 느껴지지만, 자신의 감정 변화를 모두에게 실없이 터놓는 것을 어려워한다.


근데 신기하게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이해'라는 단어는 상당히 어려운 단어다. 그 사람이 하는 말, 그 속에 있는 상황, 그리고 그 사람이 느꼈을 감정, 생각들이 정말 내 마음 속에 와 닿았을 때 비로소 "이해해", "이해 간다"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보통은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한다기보다, 자신의 논리체계에 맞춰 생각할 수 있는 정도로 이해를 언급하곤 하니, 사실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폭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 멋있게도, 핀치와 같은 사람들은 감정들을 스펙트럼 넓게 느끼고, 단 하나의 감정이라도 깊게 체험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다들 경험하는 것들이 다르니까, '완벽한 이해에 가까워진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들에게 감정, 기분, 정서는 거대한 파도처럼 무서운 존재이다. 하나도 허투루 지나 보내지 않고, 크게 마음속에 요동치게 나둔다. 기어이 느끼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파도가 칠 때마다 그들은 동요한다. 하지만, 다시 말해서, 하나도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게 없다. 그들이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그들이 사람을 대하고, 어떻게 감정 표현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의 불안이 그들을 잠식할 때 사람들에게 최대한으로 피해를 안 끼치게 노력하는 대신 이상적인 사회생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안을 가진 사람들을 알아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모든 이가 불안을 겪기 때문에, '각 개인이 불안을 가지는 시기에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게 알맞을 것 같다.


이 두 가지 점은 핀치와 같은 이들이 가진 장점이자 빛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아름다움, 신남, 즐거움 등 추상적인 것에서조차도 무형의 기준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들을 추함, 슬픔 등으로 이야기한다. 자연스럽게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들은 설령 그것이 부정적인 어감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부정적인 분위기를 가지게 된다. 이런 세계에서, 핀치는 어디에서든지 빛을 찾아낸다. 추함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고, 슬픔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핀치와 바이올렛이 여러 장소들을 오가며, 그를 잔잔하게 즐기는 장면들에서 보여진다. 소소한 것의 감사함과 가치는 소소한 것을 진심으로 즐겨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러니 기준에서 벗어나는 어려운 것들을 진심으로 즐겼던 사람만이 그것을 괜찮다고 보담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제목으로 '눈부신 세상의 끝에서, 너와 나'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앞의 이야기들을 담아 'All the Bright Places(모든 빛나는 곳들)'이 더 적합하게, 아름답게, 의미 있게 느껴진다. 그리고 핀치가 자살한 후 바이올렛이 과제 발표하며 말한 대사들은 더더욱이 모든 빛나는 곳들에 대한 의미 전달로 여겨진다. (이는 글의 마지막에 원어로 전체 적어둘 예정이다.)


넷플릭스의 수많은 다양성 영화 중에 맘에 들었던 작품이 잘 없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은 내가 힘들어질 때 다시 보고 싶은 장면들로 가득했다. 이처럼 나 같은, 불안한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또 알았으면 좋겠다. 그들만큼 모든 빛나는 곳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설령 그 사실이 무언가를, 불안을 이겨내게 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그를 파고들고 생각하며,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어느 누가 기준에서 벗어났다고 욕할 수 있으려나.


그들의 존재 가치는 이 꾸밈 많은 문장들로 절대 채울 수 없다. 그래도 이것이 하나의 위로가 아니라, 객관적인 칭찬으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이 가장 불안할 때 그 빛을 채워줄 수 있는 작은 실오라기라도 되기를 욕심내서 바란다.


또 다른 얘기로, 영화 속에서도 그러하듯이 핀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핀치가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도 기다린다. 핀치기 돌아오면 어느 정도 화를 내고 여러 상호 작용을 이루어 내겠지만, 그들은 핀치의 행동에 제약을 둘 수 없다. 이것이 의학적으로 불안을 치료할 수 있는 올바른 주변인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핀치의 주변인이 되는 것이 처음일 터이다. 어쨌든 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핀치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주위에서 가까이 귀 기울여 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불안이 올 때, 가장 객관적이고 타자인 것만 같은 사람을 붙잡고 울어도 된다는 말이다. 원래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휩싸여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꼰대 같은 말은 집어던지더라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불안을 겪는 당사자든, 그 주변인이든 함부로 비판하고, 비판받을 자격 없다는 것이다. 그냥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있을 뿐.


I used to be worried about everything.

Things that seemed meaningful were actually meaningless.

I worried about life.

I worried about what would happen if i let myself feel again.

I thought i didn't deserve to.


Then without really knowing, I changed.

I wasn't worried about what would happen if i lived.

I was worried about what would happen if i didn't. What would i miss.

I worried about not remembering. Not remembering all of the moments.

All of the places.


And that's because of Finch.

Because he taught me to wander.

He taught me that you don't have to climb a mountain to stand on top of the world.

That even the ugliest of places can be meaningful, as long as you take the time to look.

That it's OK to get lost as long as you find your way back.


But in learning all of that, I missed seeing something more important, seeing Finch.

I missed that he was in pain.

I missed that he was teaching me all along how to move on.


Finch was a dreamer.

He dreamt while he was awake.

He dreamt of all the beauty in the world, and he made it come to life.


Finch taught me that there's beauty in the moest unexpected of places.

And there are bright places, even in dark times.

And if there isn't, you can be that bright place with infinite capac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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