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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Feb 02. 2020

전통(윤리)에서 '개인'이 가지는 의미

개인의 의미 변화를 중심으로


 요즘 전통윤리와 가족윤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관혼상례와 같은 우리의 전통에 수긍하던 예전과는 달리 현대사회에서 공유되는 새로운 의식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 의식에 따라 전통과 가족윤리의 재편이 불가피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는 그 의식의 중심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인이 가지는 새로운 의식의 중심점을 알아낸다면 우리 사회의 전통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야하는지에 대한 해답 또한 밝혀낼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위해 나는 예전과 현대의 의식 차이에 대해 탐구해볼 수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는 두 시대의 의식 차이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해 주목해보았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의식 차이는 개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현대 사회의 새로운 의식의 중심점은 바로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개인의 행복에 굉장히 예민하다. 개인의 심리변화에 집중하고 개인이 어떤 요소에 어떻게 가치순위를 매기는지를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의미는 예전의 그것과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서 현대인들은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들에 상당한 관심을 가진다. 그 예로 복지와 여가생활이 있다. 실제로 이에 대한 연구도 이뤄지고 있는 상태인데 특히 복지 선진 국가들의 경제 시스템과 복지 체제와 관련하여 동아시아권에 적용가능한지는 복지와 관련하여 현대인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이를 보자면 현대인들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얼마나 바꾸고 싶어 하는 지 가늠이 되기도 한다. 또한 복지 선진 국가의 복지 체제와 같은 경우 그 체제가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책임보다 개인이 가지는 자유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이 가능하다. 현대의 수많은 개인들은 이를 선호하는데 단체보다도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국가적 서비스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범주 내에서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회를 꿈꾼다는 말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예전과 현대의 의식 차이를 개인이라는 중심점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점은 개인의 이익을 눈치 보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한다는 점이다. 이전의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단체를 위해 암묵적으로 희생당해야 하는 존재였다. 단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 달리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개인이 이익을 좇는 합리적 이기주의자임을 부정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어느 한편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단지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흘러가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현대 사회의 단점으로 보기엔 이 추세는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더불어 짚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지는 이것이 모두 단체의 유지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개인이 사익을 위해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를 예전의 한국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부정하고 억누르며 단체의 행동만을 강요하면 당연히 어느 정도까지의 단체 유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익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다. 이를 인정하고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개인에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단체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인지시킨다면 그 전의 방법보다 단체 유지가 원활할뿐더러 훨씬 더 생기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판매 사원은 자신의 소득을 올리기 위해 친절하게 손님들을 대하고 물건을 최대한 많이 판매하도록 노력할 것이고 이것은 기업의 평판을 높이고 기업의 판매량까지 올리는 윈-윈(win-win)구조로 발현된다. 이렇듯 현대의 추세는 어쩌면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이었던 예전의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동이 있는 현재, 근대적인 면모를 벗어나지 못한 전통과 가족윤리는 반드시 재편되어야 함이 확실해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과 가족윤리는 현대인들이 가지는 개인이라는 의미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온전히 개인에게 쏟을 수 있는 시간을 중요시하는 현대인들의 가치관과 달리 우리의 전통윤리에서는 시간과 노력을 전통적인 가족의 범위(대가족)에게 쏟아 붇기를 바란다. 또한 여성과 관련해서는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권리까지도 침해하고 있으며 엄격한 위계질서를 내세우며 개인의 의견이 무시당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된다. 이는 가족윤리에서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가족이라는 명목 하에 개인의 책임을 모두가 떠안기를 바라며 위계질서를 세우며 개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게다가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여 개인을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전통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이 희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하게도 예전 사회의 의식 그대로의 것이다.


 이러한 전통과 가족윤리에서의 논쟁점들은 생각보다 쉽게 현대의 의식 상태에 맞게 바뀔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을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혼상례와 같은 전통의 경우 대가족의 일원이 모두 모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린다던지 사용되는 음식들의 수를 줄인다던지, 굉장히 간단한 방법들을 통해서 융통성을 찾아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성들도 부엌일을 하게 하여 여성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도 당연한 해결 방법이다. 대가족보다 개인의 생활양식이 어느 정도 앞서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비효율적이고 융통성 없는 전통을 따르는 데에서 오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다. 가족윤리와 같은 경우 개인의 범위를 침해하지 않고 개인의 책임은 가족이라는 단체가 아니라 개인에게 1차적으로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자식의 진로 희망과 그에 따른 노력들은 부모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 자기 개발의 영역이기 때문에 자식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종류의 가족들은 우리 사회에서 위계질서를 가지기 이전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개인을 합리적인 이기주의자로 간주한다면 전통과 가족이라는 범주에서의 윤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현대 의식과 전통, 가족윤리 사이의 괴리를 해결하는 방법이 쉬운데 왜 지금까지 문제가 해소 되지 않고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는 걸까?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해결 방법이 객관적인 복지, 경제 부분과 달리 추상적인 심리적 이익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가족윤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개인의 이익은 심리적 이익이다. 개인의 이익은 단지 개인에게 오는 경제적 혜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심리적, 정신적으로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이며 전통과 가족윤리와 같은 경우 기업윤리와 같은 경제활동에 직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인간관계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이 심리적 이익을 따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심리적 이익은 경제적 이익과 달리 그 경계선이 매우 모호하고 사람마다 이익이라고 여길 수 있는 범위가 매우 다르고 주관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따지기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변화를 요하는 일이므로 경제적, 사회제도적 문제처럼 명확한 처벌이 가능하지 않고 공론화를 통한 논쟁을 통해 어느 정도의 객관적인 결론 도출이 행해진다. 이렇기에 전통과 가족윤리에서의 논의는 계속 진행되고 있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특히 기성세대들과 그 윗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은 현대인들의 의식과 정반대이거나 부딪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고치기 위해선 그들의 고정관념들이 현대에 맞지 않다는 걸 납득시켜야 하는데 이것은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인다고 해도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논의를 제대로 끝내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논쟁점들을 공론화시켜 사회적인 기준을 공공연하게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이에 관련된 대화와 소통이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각자의 단체에 맞게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분위기는 현실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SNS(Social Network Services)를 통해 각자의 상황을 공유하고 개인은 여기에 대한 다양한 피드백을 받고 선별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맞는 해답을 찾아간다. SNS뿐만 아니라 TV 등의 매체에서도 축소화, 간소화된 명절 관례들을 보여주며 현대인들의 의식에 맞는 사회적 흐름을 생성하고 있다. 또한 가족이 생성되는 출발점인 결혼에서부터 대가족의 의무를 강조하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으며 독립한 하나의 가정으로 여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전통윤리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예전의 폐쇄적이고 강압적이었던 측면을 보였던 전통 관습에 있어서는 사회적으로 축소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으며, 개인이 이행하는 역할을 단체를 위해서 하는 당연한 책임이 아니라 모두 각자 부담해야 하며 개인의 능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공론화가 일고 있다. 다시 말해 심리적으로 개인을 온전히 개인으로 인정하며 단체의 부속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의 의미가 분명해졌다고 해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 그 가치는 변함없이 상당한 중요도를 지니고 있다. 가족은 영원한 개인의 울타리이다. 더구나 그 가치가 예로부터 부각되어온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이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차별화된 '정' 문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렇기에 전통윤리가 재편되어 개인이 단체의 생활양식보다 앞선다는 것은 가족과 전통을 모조리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모순적이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러한 재편과정의 목적은 가족의 화합과 전통의 유지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순위로 생각할수록 집단을 따라가려다 개인의 행복을 떨어트리는 일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를 통해서 가족 내에서의, 특히 명절 때마다 일어났던,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스트레스 작용을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했던 윈-윈(win-win)구조와 같이 개인은 개인이 속한 집단에 불가피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이것을 가족윤리에 대입시키자면 개인은 본인의 이익을 좇아 본인이 속한 가족의 이익을 위할 수밖에 없고 이는 더 나아가 전통적인 가족의 범위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 국가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개인주의가 단체주의를 포괄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예전 우리 사회가 그러했듯 단체주의만을 표방할 때보다 집단을 향한 맹목성이 약할 것이다. 하지만 이유 없는 맹목성은 오래 유지될 수 없다. 사익이라는 명목을 가진 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단체야말로 그 힘이 강력하다 할 수 있다. 어쩌면 이것은 청렴과 겸손을 강조해왔던 우리 사회에서는 적나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생각보다 국제적으로,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일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력한 동세(movement, 動勢)라고 할 수 있다. 존 롤스는 정의론을 내세우며 인간은 모두 합리적 이기주의자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복지제도와 경제 체제를 정비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사익을 좇는 존재라는 걸 인정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충분히 고찰해보아야 하는 이론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한국의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복지 선진 국가와 같은 경우 존 롤스의 정의론을 명백히 실행에 옮기고 있다. 복지 선진 국가로 널리 알려진 북유럽 국가들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강한 국가의 조합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공유되고 있는 이 의식은 개인주의를 모방한 단체주의로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동세를 현대인들이 우리 고유의 전통과 가족윤리를 흔드는 위협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만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전통은 크나큰 논쟁 없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윤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관계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바꾸기가 어렵지만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물 없이 사람들의 사유를 통해서 점차적으로 형태를 바꿔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이 살아가면서 새롭게 발현되는 사유 방식을 언제까지고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 이렇게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에 맞는 방법들을 모색해내고 그를 납득시킬만한 논리와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단체를 위한 단체가 아니라 개인을 위한 단체로서 전통과 가족윤리가 행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한 상황에 맞는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이때에도 개인은 단체 유지를 위한 도구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던 예전과는 달리 합리적 이기주의자로서의 개인을 추구하는 현대에 맞게 예전의 것들을 재편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시대적 갈등과 관계없이 우리 모두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기에 이 모든 노력이 가족의 화합을 위한 쓸모 있는 고민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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