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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Jan 07. 2020

정신적 자만심과 용서

영화 '두 교황'


나는 무교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교회에서 준 닭다리와 사탕을 먹은 적 있다. 그리고 조부, 조모가 불교를 믿으셔서 제사를 불교에서 지낸다. 하지만 내 자체가 신앙심을 가지고 무언가를 믿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종교가 가지는 힘은 믿는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서 나오는 초월적인 힘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믿음, 사랑, 희생. 우리가 가진 힘을 증명해 보이는 일 같다. 하지만 종교인들 중 이를 자신이 표출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오히려 그런 감정들, 힘에 있어서는 모두가 겸허하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자체를 믿는다. 명백한 악으로 빠지지 않는 한.


영화 ‘두 교황’에서 로마 가톨릭, 성당에 대한 탐구를 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나는 종교가 우주, 차원을 뛰어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이를 통해 배운 것들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신적 자만심. 교황 프란치스코와 베네딕토 16세, 이 두 교황에게서 배운 것은 정신적 자만심이다. 영화 내용을 먼저 말하자면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가 교황 자리를 퇴임하려 하면서, 프란치스코 추기경과 이야기를 나눈 것들이 담겨있다. 이러한 서사 중 프란치스코 추기경이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일들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그리고 그 이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에게 그것이 ‘정신적 자만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신적으로 자만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려운 말 같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용서’라는 정신을 예로 들어보자. 남보다 나를 용서하는 일이 더 어렵다. 가장 어렵다.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 우리는 그 참회와 반성, 부끄러움으로 살아간다. 성장하고 선이라 믿는 일을 행한다. 계속 나 스스로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서. 하지만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정신적 자만심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닌지 확인해 보아야 한다. 나 스스로 높은 선을 정하고, 그에 못 미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계속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그 밖에 안 되는 인간임을 겸허히 인정하고 더 좋은 선을 추구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일 수도.


그러니까 과하게 나를 갉아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들이 참회만으로 얼룩진다면 그것도 힘든 일이지 않겠는가. 아직 갈 길이 멀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참회가 부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겸손함은 순수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필수적이다.


그 겸손함으로, 지성이나 힘이 아닌 내 살아온 방식에 의해 살아가게 된다. 돌아보고 변화한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에 따르자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변화와 쉽게 혼동되는 타협이 아니라, 맑은 변화 그 자체이다. 이것은 한순간에 쌓아지지 않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완성된다. 분명 시간의 흐름이 있어야 용서가 가능하다.


보통 겸손함과 용서는 거리가 꽤 먼 단어들로 기억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두 사람의 대화로 증명된다. 증명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 어찌 되든 겸손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 내가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만일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을 버리고 정신적으로 자만하지 않고 싶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많이 들어 본 구절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용서하는 일이 가능한가는 항상 나에게 의문이었다. 그것 자체가 오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것이 겸손한 말이라는 것을. ‘너의 짐을 덜고, 내가 받아들이겠다’는 그 구절은 단편적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평생을 걸쳐 용서가 필요하다. 불완전한 존재라서. 그리고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말처럼 ‘뒤돌아 보면 확실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두 헤맨다.’ 정신적으로 자만하지 않고, 시간을 가지고 변화하며(참회하며), 잘 용서하는 법을 알 수 있기를 모두에게, 나에게 빈다.


사족:

어쩌면 우리가 하는 일들에 죄악이라 이름 붙이는 것부터가 순수한 일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언제나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가 필히 요구되는 존재라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느슨해지지 않도록 또 노력해야 한다.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It was not enough(그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It was not enough.’ 불충분하지만, 우주의 섭리로 시간이 흐르고 변화했다면 꼭 정신적 자만심을 되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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