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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Jan 06. 2020

무계획과 기생충: 송강호는 틀렸다.

영화 '기생충'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무계획이 계획이다.’


완전히 대비되는 아들(기우)과 아빠(기택). 아들은 계획이 있는 삶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게 친구(박서준_민혁 역)가 준 수석으로 나타난다. 친구는 아들과 달리 계획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대표적인 한국의 청년이다. 그가 준 수석은 아들에게, 아빠와 같은 환경이 마련해 줄 수 없는 계획을 추구할 수 있는 부러움, 욕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마음으로만 존재한다. 어떠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실행하려는 행동력은 없다. 그로 인해 아빠의 말대로 무계획의 삶을 살게 되고, 결론적으로는 여동생이 죽었으며, 아빠는 행방불명이 된다.


위계는 어디서나 있다. 우리가 사고를 하고, 말로 내뱉고, 제스처를 취하는 것조차 순서가 있고 위계가 있는 일이다. 개인에게도   없이 많은 위계들은 당연히   이상이 모이는 자리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가 몸소 느낄  있는 계급일 것이다. 카스트 제도와 같이  계급을 분배하고 그에 맞는 삶을 강요하는 사회는 아니지만, 영화 내에서도   있듯이 자본을 통해 우리에게  위계가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부자는 천장과 가까이, 가난한 자들은 끊임없이 지하로. , 불호와 선악을 따질 수는 없다. 하지만 명확한 것은 누구나가 천장과 가까이 있는 삶을 지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수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편히 사는 여유를 본능적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난한 자들은 부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천장과 가까운 곳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자리가 채워지면 정말 기생충처럼 그들의 흔적을 가린 공존한다. 등장인물들을 영화 제목 그대로 기생충처럼 묘사하는 봉준호 감독의 위트는 정말 대단하다.


하여튼 다시 계획과 무계획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아빠의 무계획은 실패한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그들을 기생충으로 살아가게끔 만들었다. 그렇다면 계획은 그들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게 만들까? 아들이 아빠에게 편지를 쓸 때, 그리고 현실인지 가상인지 모를 아들의 집 매입 장면은 답을 명확하게 만든다. 편법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무기력하게 있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들은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서 일을 할 것이고, 다시 직장을 구할 것이다. 천장 가까이 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높은 확률로 아마 그곳까지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적어도 기생충의 삶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 가족 이전에 지하에서 살던 남자가 이선균(동익)에게 충성을 하는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회 전체적인 맥락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맥락까지 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생충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생충화 되는 결정적인 문턱에서 아들은 계획을 다짐하며 여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개개인적으로 사회 자본 계급이라는 위계를 무너트림과 같다. 이제 더 이상 아들에게는 그 부자 집안의 무언가를 매일같이 야금야금 뜯어먹을 명분도, 이유도 없다. 단지 그의 계획의 실행과 결실에만 집중할 뿐이다.


영화가 개봉된 후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빈곤, 빈부격차, 복지 등의 문제는 남아있다. 무기력은 빈곤의 허망함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지 않는다. 가혹할지라도 일어나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자생할 능력은 필수적이다.


영화에서 빠져 나와 현실을 보자면 매섭게 냉정하다. 우리는 무기력 해지는 순간, 바로 기생충이 되어버리는 현실에 살고 있다. 복지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최저 선을 지켜주는 복지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필연적이게 ‘천장 가까이’를 궁금해 하게 된다. 이런 모든 딜레마는 ‘무계획이 계획’이라며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완벽히 해당된다. 슬프게도 그렇게 안주하기는 매우 쉽다. 이를 보고 있으면 신이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기생충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인류인데, 어느 누가 기생충이 되고 싶을까? 현재 20대를 보내고 있는 사람으로써,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요상한 말을 들으며 퍽퍽하게 계획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답답함은 뭔지. 지금 이 선에서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면 기생충이 되어 버린다니. 결론은 사회 자본 계급이라는 위계에서는 벗어나지만, 나의 자아 위계에서는 내가 밑에 있음을 인정하는 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계획은 절대 계획이 아니다.


계획이 없는 나는 절대 내가 아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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