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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Jun 11. 2020

할머니가 나에게, 여성으로서 알려준 감정

'부끄러움'을 교육받으며 살아온 그녀에게


0. 우리 할머니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을까.

 나는 우리 외할머니를 사랑한다. 대학 때문에 짐을 싸고 집을 떠나던 그 순간, 할머니 혼자 손 흔들며 배웅해주던 모습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많은 기억들이 내 기억 속 할머니를 형성하고 있다. 조부모에 대한 기억은 항상 이런 식이다. 막상 그들을 직접 대할 때는 애쓰지 않으면서, 그들을 혼자서 떠올릴 때는 따뜻함, 아쉬움 등의 감정 소용돌이 안에 빨려 들어가곤 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감정들은 '객관적이지 않다'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만들어 내는 노스탈지아가 분명 있지만, 정작 그들 개인의 삶, 이름 석자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느낀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불가피한 사고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조부모와 나의 삶이 겹치는 부분은 짧다. 심지어 그 짧은 부분 중에서도 우린 그들의 '늙음'만을 마주한다.)


  사실 내가 우리 할머니에게 가지는 사랑은 연민의 그것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 당시의 '할머니'들이 그러하듯 우리 할머니는 초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또래 일본 학생들에게 놀림도 당하셨다. 한국 와서도 결혼하기까지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그 후엔 운명과 끊임없이 싸움하며 살아왔다. 남편과 아들의 단명. 하나 남은 딸은, 내가 보기에도, 히스테리컬하고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사람으로 자랐다. 시대적 분위기가 그녀 손에 쥐어준 것은 악착같은 생활력과 부엌데기의 삶밖에 없다. 나처럼 내 이름 석자가 잘 보이도록 갈고닦을 시간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그녀 또한 그것을 한스러워한다. 본인이 '학교를 가서 공부를 해봤더라면..', '영어 한 자라도 알았더라면..'하고 말이다. 객관적이지 않은 위치의 손녀로서 말하자면, 우리 할머니는 정말 영석한 사람이다. 자기주장도 세고, 깔끔하며 똑 부러진다. 아직까지 일본어를 잊지 않았으며, 텔레비전에 나오는 방송국의 알파벳 또한 다 알아맞힌다. 이런 얘기를 하고 나면 항상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학교가 가고 싶었던 할머니가 부모님께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부엌일을 하고 난 후 연필을 숨겨 학교로 뛰어갔다는 사건.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공부를 위해 노력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녀의 타임라인에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자녀들은 무지막지하게 공부를 잘했다. 물론 그들 또한 일반적인 '결실'을 맺지 못했고, 그것을 무기 삼아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기도 했다. 어찌 됐든 할머니는 그 시절을 '재미 봤다'라고 표현한다. 학교에 가면 '○○의 엄마', '우등생의 엄마'로서 재미 봤다고.)


 나는 가끔 이 사실의 반대를 가정하여 상상하곤 한다. 만약 할머니가 유학을 갔었더라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지냈을까? 만약 할머니가 하고 싶은 일을 나중에서라도 찾았더라면 난 어떤 모습으로 그녀를 기억했을까? 이런 실없는 가정말이다. 그리고 이건 모든 손주들이 한 번쯤은 해봤을 법한 상상이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우리 할머니들은 내가 감히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어렵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히 대부분의 손주들은 할머니들이 머리로 구현해 낼 수 없을 만큼 다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 또한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그리고 그녀들은 이것 자체가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도대체 왜 그랬을까. 항상 이해하면서도 이해되지 않는 의문이다.



1. 할머니가 말씀하시는 부끄러움이란

 아무튼 간,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시대적 배경'들을 겪고 할머니는 나에게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려고 노력했다. 순화해서 표현하자면 '부끄러움'의 방법이었다. 설거지를 할 때 꼼꼼하게 하여 남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럽지 않게'할 것. 생리대는 '부끄러운' 것이니 숨길 것. 단적인 예시들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한 이유는 직관적인 이해를 위해서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복잡하게 살아온 그녀를 위해서이기도 하다.


 할머니는 모든 여성을 부엌데기라고 표현한다. 그들이 맞벌이를 하든 말든 남성을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도록 조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녀의 딸뿐만 아니라 손녀인 나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초등학생 때 통조림 참치캔을 먹었던 것부터 23살인 지금 한우를 먹을 때까지 '친오빠(남성)에게 양보하지 않는 욕심 많은 여자아이'의 역할을 해야 했다. 가끔 오빠가 화를 낼 때에는, 남성이라면 그 정도 성질머리는 부릴 줄 알아야 한다며 나에게 인내를 요구했다. 다른 이야기들도 많지만 생략하고. 이렇게 할머니의 입장에서 여성이란 매사 부끄러움을 가지고 나를 숨기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똑같은 맥락으로 할머니는 나에게 여성으로서 '야사시(優し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사시'란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뜻의 일본어이다. 나는 다행히 잔다르크형 엄마 덕분에 할머니가 말하는 '야사시이 온나노코(친절한 여자아이)'에서 매우 다르게 자라왔다. 그래서 이 '야사시'가 뜻하는 바를 단순히 '친절함'으로 곧바로 치환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말하는 '야사시이 온나노코'가 되려면, 나는 나의 존재를 없애고 부끄러움만으로 잔뜩 채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 할머니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성으로서 대학을 다니는 나를 응원한다. 할머니식 표현대로라면, 옛날에 남자들이 여자를 쫑(종)으로 봤다고. 요새 세상 살기 참 좋아졌다고. 좋은 음식을 먹을 때면, 본인은 음식을 한사코 거부하며 오빠에게 젓가락으로 다 건네주면서도 나에게 배 터질 때까지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여성도 공부하고 일을 가져야 한다고. 물론 나를 데려다가 '부끄러움'의 설교를 하시긴 하지만, 그녀만의 표현으로 공부하는 여성으로서의 나를 응원한다.


 단순히 모순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싫어서 이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녀의 이름 석자가 아닌, 구시대적 인간상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특정 인물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따라 그래프를 그리면 무조건 가능할 것이라는 확신.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그녀 개인의 특정한 행적이 없어서 앞선 확신이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 그녀의 성격이라는 것이 곧게 존재하는지 아직까지도 의문스럽다. 당장 고기 먹기 싫다고 거부하는 모습까지도 진심인지 모르겠으니까.


 이런 그녀의 모습을 꾸준히 보고 있자면 미우면서도, 안타깝다. 예전에 아프리카 코끼리 관련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코끼리를 잡으면 두꺼운 나무와 줄에다 묶어둔다. 초반에는 코끼리가 도망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 코끼리가 지치고 포기하면, 얇은 나무와 줄에 결박해 놓아도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을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한다는데. 할머니를 곰곰이 생각하자면 '학습된 무기력'이 떠올라 참으로 속상하다. 표현을 상황에 맞게 바꿔 '학습된 부끄러움'이라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할머니의 삶을 '학습된 부끄러움'이라는 일곱 글자로 매도 혹 축약할 수 없다. 그녀는 어찌 됐든 나의 조모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절대 객관적일 수 없는 주제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참 밉다가도 안타깝고, 그녀를 안타까워 하다가도 사랑한다. 이 사랑의 감정은 직관적인 논리로 펼쳐 보일 수도 없고, 하기도 싫기 때문에 감정에 근거를 달지 않으려고 한다.


 꽤 진부한 말일 수 있으나, 나는 할머니 말고, 사람 '오영자'를 이해하려고 한다. 학습된 부끄러움마저 그녀이고, '평범한' 조부모 같은 푸근함(배 터지게 손주에게 음식 먹이고 뭐 이런 클리셰들)도 그녀이다. 그리고 덧붙여서, 내가 어렸을 때 외출을 한다며 삐뚤한 글씨체와 엉망인 맞춤법으로 메모를 해놓고 간 '오영자'도 그녀이다.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메모가 엉망이라며 황급히 숨기며 부끄러워 하던 '오영자'도 마찬가지로. 손주들을 사랑하며 아끼던 할머니의 모습도, 손녀와 딸에게 부엌데기라 부르던 구시대적 여성의 모습도 다 좋지만, 해산물과 빨간색을 좋아하는 오영자의 모습을 더욱 이해하려고 한다.



2. 부끄러움을 교육받으며 살아온 그녀에게

 우리 할머니는 괄괄한 편이다. 엄마와 맞지 않아 상처를 입을 대로 입기도 했다. 또 경상도에서 오래 살아서 말투도 세고, 악착같이 살아오는 바람에 사고와 행동이 드세다. 따라서 나는 그녀의 삶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기 싫었다. 그녀 삶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이 많아 보였다. 단지 할머니라는 포지션으로 입력하고 동떨어져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그녀는 치매 판정을 받았다. 요새 유명하신 박막례 할머니처럼 유라PD가 되어 당장 그녀의 일상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한 바가지지만, 아니 사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서도 있지만. 생각보다 슬프게, 생각보다 무던히 받아들였다. 이 답답한 감정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고 되뇌면서 말이다. 치매는 슬프지만 현실적인 문제였다. 이것저것 알아볼 것도 많고, 손 쓸 방법도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까지는 경미한 상태이지만, 나는 그녀가 앞으로 그녀의 삶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야속했다. 그리고 불쌍했다. 내가 오영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노력하는 건 크게 없으니 이기적인 심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찌 됐든 우리 할머니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다 같이 이사 온 이 상황을 매우 싫어하면서, 아메리카노 말고 믹스커피를 꾸준히 섭취하시면서, 내가 시켜 준 떡볶이를 맛있게 드시면서 일상을 지루하게 계속 보내고 계신다. 나 또한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 가족한테 쓴다고 고맙다'는 말 들을 때마다 오빠보다 낫다는 뿌듯함을 느끼면서 잘 지내고 있다.


 이런 일상을 보내면서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이 생겼다. 뭘 그렇게 가슴에 묻어 둔 것들이 많은지, 왜 그러면서 남자를 좋아하는지, 왜 지금까지 부엌일을 놓지 않는지. 어렸을 땐 오빠랑 나 차별하지 말라고 떼를 쓰고 화를 내고 싶더라니만은, 지금은 단지 뭐가 제일 원망스러운지 묻고만 싶다. 어디다 토로할 곳도 없이 살아왔을 그녀가 걱정된다. 적어도 이 한정된 시간 안에서 그녀가 내면 속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가갸거겨 옹알이라도 해줬음 좋겠다. 스스로 부끄러워 해야 했던 것들을 쌍욕을 하며 뱉어냈으면 좋겠다. 엉엉 울어버리는 시간의 처연함을 싫어하지만 그녀의 배를 빌려 만들어진 엄마와 내가 마땅히 받아내야 하는 숙제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야 이토록 이기적인 내가 그녀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다.


 한정된 시간만이 남았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내가 지금부터 쉬지 않고 노력해도, 할머니를 세상 누구보다 호강시켜 드리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냥 나는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그녀가 다음 생에 공부 많이 해서 대학 진학하기를, 맛있는 거 원하는 만큼 실컷 먹기를, 이혼해도 화냥년 소리 절대 듣지 않기를, 멋있는 커리어 우먼으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할 뿐이다. 더 많은 위시리스트들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평범한 오영자의 삶부터 시작하기를 너무나도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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