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이토록 보통의’ 中 티타 편
*내용 소개는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티타
나는 근처 사람들이 저 스스로를 ‘내 친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재주라고 해야할지. 솔직한 말로 비겁한 속성이기도 하다.
특별한 사연을 가지는 것이 빛나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던 적이 있다. 성인 되기 전, 꽤 오랫동안. 그건 나를 빛내기 위한 수법이자,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 스스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방법이었다.
난 사연을 덤덤하게 전달하고, 특별한 말을 내뱉는 인간이 됐다. 그리고 상대는 특별한 말을 전달받는 소중한 인간이 됐고. 둘 다 감정에 솔직한 척 하지만 허영-자의식 과잉이었다. 맨날 입에 붙들고 다니는 말 “난 진짜 내 이야기를 못해. 할 사람도 없고”는 1.특별성 부여 2.자기애 3.솔직하지 못함 4.열등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나도 안다. 내 이야기 = 사연이 아니다. 그리고 사소한 것의 공유가 오히려 중요한 것일 때가 많다.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다. 난 사소하게 뭔갈 공유하는 게 서투르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못한다고 느낀다.
(그땐 그게 내 우주였으니 과도한 자기반성도 자의식 과잉이다. 지금의 나로선 그때 모습도 나 정도의 인간이라서 멋있어 보인 거라며 웃으며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내 사연이 그리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딱 적당한 정도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어떤 자칭 타칭 무결점에 가까운 사람들이 보기에 큰 일일 수도 있으며, 혹 그들의 건방진 시선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기도 한다.
어찌 됐든 지금은 나를 규정할 때 사연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과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내 성격들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만족하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배경으로 내 세계에 갇히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아직 배울 것이 많다는 득도의 자세로. 반대로 타자들이 그들의 자아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들의 입장, 말투, 좁거나 넓은 시야. 나를 경계하려고 한 건데. 어쩌다 보니 나한테 제일 배려 없는 사람이 됐다. 그래서 그들의 입장에서 ‘내 친구’가 되는 사람이 많다. 좀 웃긴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느낀 건 앞의 상황과 달라진 것 같지만 썩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사연)’라는 자의식 과잉을 쥐고 흔드는 건 똑같다. 사용법이 반전되었을 뿐. 그래서 비겁한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내 친구’들을 밀어내지 않는다. 멍청하지만 즐긴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그렇게 느껴주는 사람이 고맙지. 소통이 서투른 나는 나만의 속도대로 예쁜 친구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조금씩 줏대가 생기면서 사람 분별하는 능력을 탄탄히 하고 있다. 이는 내가 비겁해지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조건이 생겼다. 1.그들의 입장을 듣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2.그래서 내가 또 서툴러진다면 그건 내 양적 데이터 상 전혀 가망이 없다는 것. 이렇게 또 나는 나를 더 챙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다.
‘이토록 보통의’ 중 ‘티타’ 편을 다시 봤다. 삼 년 전과는 다른 감상이었다. 그러나 결국엔 또 티타에게 감정 이입해 동질감을 느끼고.
나랑 똑같은 나이였던 티타는 그 이야기 속에 멈춰 있어서, 더 이상 나와 동일시하며 앞으로 성장해 갈 인물상이 없다.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그래서 내 맘 편히 선택하고 배워가고 있다.
티타는 20살의 나에겐 가장 큰 터닝포인트였다.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모두 자의식 과잉은 아니다. 상처 회복이 안 된 사람들에게 그 말이 얼마나 흉터가 될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