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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Sep 22. 2020

사랑에 발 붙이고 살고 싶을 때

영화 ‘베티 블루 37.2’


 세 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보고 나면 진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떤 연인들이 2020년에 저런 사랑을 나누겠어’ 하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으면서, 결국엔 영화를 다 봤다. 베티와 조르그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는 모조리 배제되었다. 터무니없는 사랑 타령이라 여기면서도 사랑만 주야장천 외치는 영화 내러티브 때문에 사랑을 생각했다. 이런 게 세뇌 효과가 아닐까.


 이 영화를 알게 된 건 친구 추천이었다. 내 친구의 최애 영화. 그리고 영화를 검색했을 때 온통 사랑 이야기, 호평 일색. 기대가 많이 부풀어 있었다. 그 기대를 채운 건 영화가 끝나고 나서였다. 사랑의 형태는 누구나에게 다르다고 말하는 나지만. 아니다. 그런 나여서 베티와 조르그의 사랑이 원 없이 완벽해 보였다. 나는 저런 사람을 찾아서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영화 때문인지 은근 그 낭만에 빠져있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낭만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비슷한 맥락으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봤을 때, 손으로 유리창을 부수고 강도짓으로 돈을 마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여장을 하는(그냥 나열하고 싶었다.) 사랑을 할 순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현대 교육에 알맞게 체계화된 지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가 평점이 높다는 사실은 꽤 매력적이다. 현실에 발 붙이고 사는 이 지성인들은 사실 사랑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아니라면 영화 같은 낭만이 허용되는 무언가에 발 붙이고 싶을 지도. 내가 그렇다. 이런 면에서 MBTI로 유형을 나눈다는 것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진다. 넌 이상주의, 난 현실주의. 그게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을 따지는 사람들만 이 영화를 좋아할 수도 있겠다. 현실 속에서 사랑을 탐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코미디에 가까운 영화일 것이다. 글솜씨 전혀 없는 자신의 애인을 치켜세우는 베티든, 현실 세계에서 카톡으로 하트를 주고받는 연인이든 둘 다 유치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포르투갈에서 한 달 살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곤 곧장 스웨덴으로 건너 가 교환학생 생활을 했고, 그 중간에 핀란드에 가서 오로라를 보고 왔다. 팬데믹 덕분에 신기루 보듯 후딱 지나가버린 3개월이었다. 참 신기하게도 그때 사진 속 모습이 예뻐 보였다. 매일 먹었던 와인과 감자칩 때문에 살쪘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 삶에서 영화 속 사랑을 조금이나마 닮은 시기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청춘의 여행’이라는 테마의 흔한 로망일 수 있다. 물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지 그뿐은 아니다. 나를 위해 향초를 켜고, 요리를 하고, 춤을 췄다. 그것들은 나를 재단하는 남들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런 기분이 처음이라 많이 들뜨기도 했다.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존재한다. 보통 그들 중 소수만이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걸 알면서도 우리는 사람들의 존재성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한국 사회 특성상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는 잠시 빼두겠다. 낭만을 이야기하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를 의심하기 때문에, 낭만만 마구 따지는 분위기를 항상 추구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모든 사회의 인구들은 본능적으로 남을 의식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나를 위해 에너지를 쓸 겨를이 없다. 불가피한 흐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도 인간이 만든 창조물이다. 현실에 발 붙여야 하는 불가피함 속에서도 사랑을 찾아내는 인간들이 있다. MBTI로는 F형이 이 그룹에 속하겠지. 비꼬는 말이다. 현실에 발 붙이다 못해 박혀 있는 사람들도 소시오패스가 아닌 이상 낭만을 알 테니까. 이 말도 안 되는 서사 속에서도 우리는 베티와 조르그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의심하지 않았고, 서로에게 충실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는 사랑의 기본 성립요건일 것이고, 다른 이에게는 어려운 숭고함이다. 결국 말하고 싶었던 것은 형태와 관계없이 사랑(낭만)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 스스로에게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을 때,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듯하다. 그리고 사랑의 대상은 에너지를 똑같이 분배받는다. 그것이 장소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상관없다.


 구성에 대한 별 고민 없이 글을 쓰고 있다. 왠지 이 영화를 논할 때라면 이해받을 것 같아서. 한 가지 생각만 가지고 썼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낭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적어도 그리워할 수 있는 (낭만의) 대상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했으면 좋겠다. 2020년, 해낸 것 하나 없이 지나갔다고 죄책감 가질 현대 지성인들이 많다. 나 또한 그렇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것에 위로의 말을 던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본인들이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죄책감 따위 조금 버려도 되지 않겠나. 방구석에서 인스타그램을 보며 낄낄 거려도, 그 순간만큼은 사람들의 존재성을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만약 그 순간에도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면(카톡 혹 댓글), 그렇다면 반성을 조금 해도 될 것이다. 솔직한 말로 그때 생긴 죄책감은 사람들과의 비교로 생긴 감정이니깐 말이다. 절대 자아를 위해 창조해낸 감정은 아니다. 반대로 나로 존재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졌다면, 그것 그대로 이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마스크 끼지 않고 다녔던 시간들을 그리워하는 것도 어쩌면 낭만일지도. 이것 역시 조금은 비꼬는 말이다.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사랑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유럽 여행을 꿈꾸는 이유도, 자만추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도 다 그것에서 비롯됐을 거다. 이렇게 로망(낭만)*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가 다 미적지근한 온도에서 살기 때문이다.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 굴레는 사람들의 존재성에서 벗어나야 탈피하는 개념이다.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 영화로 가끔 욕망을 채우고 살 수밖에. 2020년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어차피 코로나 아니어도 우린 미적지근하게 살았을 거라고. 그럼 사랑에 발 붙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형의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해야 할 뿐이다.


*로망과 발음 비슷한 한자로 단어를 만든 것이 ‘낭만’이다. 이상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상적. ‘이상적’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절대 이상을 현실에서 채울 수 없다. 머릿속에서 계속 그리워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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