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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여진 Jan 09. 2019

나의 지구와 달

연극 '달의 저편'

나의 지구와 달


1.

'나의 지구와 달'은 중의적인 표현으로 비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지구와 나의 달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나의 지구와, 달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극 '달의 저편'에서는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지구에서 중력과 마주하며 살아간다. 연극 '달의 저편'의 주인공 필립 역시 중력과 마주하며 그의 지구에서 살아간다. 필립이 동경하는 소련의 코스모넛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생 안드레가 바로 그의 지구에 작용하는 중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필립이 '동생 안드레의 부족한 교양, 호기심, 가치관이 부러우며 자기처럼 날카로운 사유나 예민한 인간성 때문에 잠 못 드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자신의 지구에서 우주를 바라보고 있는 중력에 의해 이해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우주를 찾아다니는 코스모넛에 대해, 그 아득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현상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그 중력이, 우주로 나아가려는 필립을 다시 지구로 끌어내린다. 이때의 경우를 제목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필립의 지구와 그에 도달하지 못한(필립의 달이 아닌) 달이라고 설명 가능하다. 그는 그의 지구에 갇혀 있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필립이 그의 이론을 전달하고자 했던 시도들은 실패하게 되었고, 그의 메시지가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었다는 확신조차 없다. 그러나 그에게는 밥을 같이 먹을 동생 안드레가 있었다. 이렇게 그는 안드레와 화해를 하게 되고 필립은 우주를 유영하는듯한 마지막 연출을 통해 공중으로 떠올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진실한 화해인지,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관객이 쉽게 판단을 내리지는 못하나 필립은 그렇게 믿고 있다. 이것은 필립이 발사대를 달의 저편에 설치하자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이 화해와 달의 저편이 뜻하는 바는 심리적인, 그리고 물리적인 지구에서 벗어나 달의 저편에 도착하여 진실로 지구를 이해하자는 것이다. 달의 저편에 도착해서는 지구가 보이지 않게 되는데, 이때 필립은 그의 지구와 그의 달을 만나게 된다.


즉, 지구에서 중력을 벗어나 우주를 향해 가기 위해선 중력의 존재를 인정하고, 달의 저편에 서서 지구의, 그리고 우주의 객관적인 모습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달 또한 타자로서의 먼 달이 아니라 진정하게 자신의 달로 -이상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연극 내용을 통해 변화하는 필립의 예시처럼 나의 지구에서 그저 먼 달, 그리고 나의 지구에서 나의 달, 이 두 가지 개념은 각자 개별적인 것들이 아니라 순차적인 과정을 거쳐 한 스펙트럼 상에서 연결되어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적용이 가능하다.


2.

지구가 얼마나 작은 행성에 불과한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이다. 그 넓고 아득한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 지구의 중력이 영향을 전혀 주지 않고, 지구도 보이지 않는 달의 저편에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았던 그 실체를 뚜렷이 바라보는 것. 지구가 아닌 먼 우주를 향하는 방향에 서서 지구에 한정되지 않고 우주를 바라보는 것. 이를 통해 우리는 나의 지구와, 달이라는 개념에서 나의 지구와, 나의 달이라는 개념으로 도달이 가능하다.


심리적으로 보았을 때 개인은 '나'라는 존재와 자존이 존재하기에 개인에게만 집중한다. 이렇게 나의 지구에서 지구 중심적인 사고를 가진 개인들에 둘러싸여 타자로서 먼 우주, 달을 바라보게 된다. 개인의 입장에서만, 개인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주변을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중력, 개인 중심적 사고의 틀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여기에서 벗어나 넓고 객관적인 범위에서 우리 주변을 바라본다면 오히려 개인 스스로가 나약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나르시시즘에 부딪혀 생긴 타인과의 불편함은 결국 그를 통해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나를 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이 모습을 인정해야 진정으로 자유롭고 발전된 내가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의식적으로든, 혹은 무의식적으로든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우주, 구체적인 목표에 더 발전된 나로서 도달하고, 온전히 그것을 이해하고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연극에 나온 어항 속 금붕어는 죽었다. 우리는 그 금붕어처럼 어항이 세계의 전체라고 생각할 수 없다. 필립처럼 어항에서 벗어나 그 밖의 세계에서 어항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3.

이러한 관점이 우리 삶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지만 필립처럼 우주를 유영하는 모습에까지 도달하지 못한 개인까지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무한한 범위의 우주에서 이 모든 작은 개인들은 끊임없이 달의 저편에 서서 우주의 방향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겪을 것이고, 이렇게 나약한 개인들은 우주의 일부로서 아주 작은 점들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는 개인들을 인식해야 달의 저편에 서서 우주를 바라보게 되는 개인들 또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이 나약한 개인들을 우리는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물리적인 거리감(지구-달-우주)이 심리적으로도 이어짐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지 않을까 싶다. 끝이 없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 그 모든 차원과 면모들이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말이다. 이러한 막연함이 주는 경이로움 속에서 우리끼리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존재한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를 존중할 수밖에 없다.


이 경이로움은 연극 속에 다양한 장치들과 연출들을 통해서도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세탁기 문이 둥근 창문이 되었다가, 우주선의 창문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지구 상의 것들이 우주로까지 그 개념을 연결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개개인이 이것을 깨닫기까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다. 자신의 한계점을 깨닫고 더 나은 자신으로 발전하는 것이 어떠한 분야에서든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라는 자아를 가지고 있는 모든 개인은 자아에 대해 성찰할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최소한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들을 가지고 있게 된다. 그렇기에 인간은 욕구와 욕망을 표출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충돌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이 한계점을 인정하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에 대해 깨닫게 되었을 때, 개인은 더 크고 막연한 세계에 대해 꿈꿀 수 있게 된다.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그를 부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극 속 '수치의 장벽(Wall of shame)'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극 초반 필립과 안드레의 불편한 사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이 '수치의 장벽'은 극이 진행되면서 안드레가 옛날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며, 필립의 이론을 떠오르게 하는 등 오히려 둘을 이어주는 장치로서 존재하게 된다. 지구와 달의 저편의 단절을 보여주던 그 장치가 오히려 단절을 없애고 더 넓은 개념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우리 스스로 형성한 그 수치의 장벽들을 충분히 활용할 필요가 있다.


4.

여기까지의 관점으로 모든 것들을 돌아보았을 때 '나의 지구와 달은 중의적인 표현으로 인한 비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명백하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토대로 한다면 이 표현은 중의적이기 때문에 비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객관적으로 문법으로만 본다면 비문이 확실하다).


두 가지의 개별적인 의미를 가지는 개념이 아니라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의미를 가진 표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의 지구, 그리고 달에서 시작하여 나의 지구와 나의 달에 도달하는 스펙트럼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불완전한 모습까지도 포용할 수 있으며, 완전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들 또한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연극 '달의 저편'의 주인공 필립이 겪은 혼란의 과정들을 끊임없이 겪어야 한다. 계속해서 우리가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지 않은지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개인의 지구에 갇혀 지구 중심적인 사고만을 한다고 판단이 되었을 때는 망설임 없이 지구의 중력을 인지하고 달의 저편으로 향해 가야 할 것이다. 달의 저편에 서서는 한계를 알 수 없는 우주를 통해 지구와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고 고쳐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완전의 형태에 가까워지게 된다.


5.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나약함만을 인식하라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달의 저편에 설 수 있다. 불완전(不完全)이 있기 때문에 완전(完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약하기 때문에(그를 인지하기 때문에) 한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와이어도 없이 거울을 통해 무중력의 상태에서 우주를 유영하던 필립처럼 말이다. '그가 과연 미래에 안드레와 평화의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는가?'와 '그가 과연 자신의 이론을 학회나 다른 곳에 전달하는가?'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하지만 안드레를 통해 자신이 보기 싫었던, 불편해했던 모습을 인정하고, 그 마지막 순간의 우주를 만끽하는 필립은 일시적이더라도 완전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이를 통해 그는 앞으로도 불완전에서 완전으로의 과정을 겪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결국 그 과정을 반복하면서 완전은 불완전이 되고, 불완전은 완전이 된다.


6.

우리가 우주로 사고와 행동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지 않았을까 싶다. 우주와 우리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이어져 있으니 말이다. 인간과 우주는 모두 개별적이며 무한히 확장되는 그런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연극 '달의 저편'에서 인간의 나르시시즘과 그를 극복하는 면모를 우주와 달에 빗대어 표현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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