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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대피도를 본 적 있나요?

살면서 도면을 보게 되는 일이 얼마나 될까요?

집을 구할 때? 새로 이사하는 집의 인테리어를 할 때?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도면을 쉽게 접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겁니다. 예외적으로 하나 있습니다. 극장에 가면 영화 상영 시작 전 나오는 비상대피도요. 앉아 있는 이상 보게 되죠.
 
언제부턴가, 아마도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뉴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비상대피도 영상을 의식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영상은 소화전의 위치, 비상시 피난 동선 등을 빠르게 화살표로 안내하고 끝이 납니다. 캄캄한 극장 안이지만 공간의 구조를 단순화한 도면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최대한 단시간에 효율적으로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익힐 수 있죠.
 
그 이후부터는 어느 건물에 가더라도 안전과 관련한 사이니지(사인물)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인 공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리하는 소화기전이나 비상대피도 등에 눈길이 가는 것이죠.


소화기는 꼭 빨간색이어야 할까요? 공간과 조화를 이루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으로 눈에 띄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사옥 내부 공간. 다양한 사이니지 형태를 가지면서도 공간과 조화를 이룹니다.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플랫폼엘 소화전. 흰 바탕에 흰색, 검은 바탕에 검은색.



나는 최고의 디자인은 보이지 않는다고(invisible) 생각합니다. 암스테르담의 스키폴공항을 걸어 보신 적이 있나요? 이곳엔 수많은 표지판들이 정말 적재적소에 붙어 당신이 원하는 곳을 매우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게 해줍니다. 당신이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말 필요한 위치에 꼭꼭 붙어 있어요. 이와 같이 아주 훌륭한 디자인은 ‘당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당신을 이끄는’ 것입니다.”

- 마틴 다비셔, “보이지 않는 디자인이 진짜 디자인이다” 일문일답 中



실제로 최근에는 사이니지 디자인만 봐도 그 건물주나 또는 한 기업의 전반적인 공간 철학이나 서비스 수준, 추구하는 가치 등을 가늠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예쁘다는 것에서 나아가 명료한 디자인으로 가독성을 높이고, 공간에 맞게 배치함으로써 의도를 세련되게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1월부터 이뤄진 팀 렛잇비의 사이니지와 비상대피도 개선 작업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습니다.
 
말 그대로 ‘개선'이 과제였습니다. 사옥을 새로 짓거나 건물을 리모델링하거나 사무실 레이아웃 개편을 고민하면서부터 함께 사이니지 작업을 할 수 있는 풍족한(?) 상황이 아니었다는 거죠. 그렇지만 기본적인 사인물을 보기 좋게 정돈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분위기는 달라질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팀 전체가 프로젝트 레퍼런스 조사를 위해 퇴근 후나 주말에도 틈틈이 보고 모은 사진들.



위메프는 여러 건물을 나눠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맨파워로 성장하는 회사인 만큼, 성장 속도에 따라 몇년 새 인력이 크게 늘었거든요. 당연히 건물의 특색이나 사무실 공간의 분위기도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최대한 모든 사무공간과 어우러지면서도 우리의 색깔이 드러나는 비상대피도와 사이니지를 만드는 것이 팀 렛잇비의 목표였습니다. 특히 비상대피도의 경우 기존 안이 너무 복잡해 정보 전달력이 떨어져 식별에 대한 부분을 포함해 디자인 개선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래는 완성된 위메프 내부 사이니지 리뉴얼안입니다. 건물마다 다른 도면의 비상대피도를 포함해 완성된 작업물만 60장이 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겨울되면 돌아다니기 추우니까 빨리 하자는 마음으로 이 모든 걸 한달 만에 해냈다는 갸륵한 이야기... (담당 디자이너들은 길치라...  꿈에서도 도면을 그렸다고...)




비상대피도의 경우 빠르고 안전한 대피 유도를 위해 시안성을 높이고자 전체 구조와 대피 동선을 간결하게 보여주되, 타 게시물이나 공간과의 조화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습니다. 화재시 대피요령 뿐 아니라 모든 사이니지의 안내 문구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톤 역시 강하지만 동시에 부드러운 어조로 통일감 있게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공간의 맥락에 맞게 컬러와 배치를 정했습니다. 사람들의 동선에 따라 노출 위치를 고민해보기도 하고...



하지만 아쉽게도 이 사이니지들은 부착되지 않았습니다.
비상대피도와 관련해 저희가 최종적으로 받은 피드백은 이렇습니다.


바탕색 - 흰색

현위치 - 파란색

소화기, 소화전, 완강기 - 빨간색

자동제세동기 - 녹색

대피동선 굵기 및 위치명 (건물) 크기 확대



어떻게 보면 심플한 요구사항 같지만, 최종안 단계에서 반영하기에는 근본적인 방향을 뒤트는 가이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궁금합니다. 소화기나 소화전은 빨간색, 자동제세동기는 꼭 녹색이어야 할까요? 게시물의 배경색은 흰색이 아닌 검은색이면 안되는 걸까요? 안전관리 담당자나 관리부서의 관점이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브랜딩은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니까요. 결과적으로 개선안은 적용되지 않았고 사이니지 개선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펜딩' 됐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합니다. 저희의 내부 브랜딩은 실패한 걸까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쉬움과 동시에 인사이트 역시 남았으니까요. 우선 BX 주관 부서로서 브랜딩에 대한 기본 자원과 추진 동력은 내부 공감대라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팀 렛잇비는 회사 안에서 아주 작은 요소로 보이는 게시판이나 외부에 나가는 제작물 이미지를 바꾸는 일에도 맥락과 철학을 가지고 큰 앵글, 일관되게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일하려고 하고요. 그것이 곧 브랜딩 아닐까요?



위메프의 브랜딩 고군분투기는 계속됩니다!





Credit


Project period

November 2018


Brand design

Yehyeon Kim, Hani Yang, Songyi Ch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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