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엔디 8시간전

그깟 머리숱이 뭐라고

밸런스게임

  " 아빠! 머리숱 vs 주름 없는 깨끗한 피부 "

  " 머리숱"

  " 왜요? "

  " 머리카락이 없으면 초라해 보이잖아 "

  " 그럼, 머리숱 vs 원하는 차 아무거나 하나 가질 수 있다 "

  " 음.... 고민되긴 하는데..., 차! "

  " 왜요? "

  " 머리숱이 많은데 타고 다니는 차가 오래돼서 덜덜거리면 초라해 보이지? 머리숱이 없어도 차가 엄청나게 비싼 외제차야, 그럼 초라해 보이지 않거든! "


  한 번도 내 손으로 옷을 사 입은 적이 없습니다. 신발이든 옷이든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좋은 옷을 입고, 멋을 부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우리 딸도 자라면서 저랑 같은 성향인지라 '아디다스 패딩' 하나면 겨울을 날 정도니 옷가지도 몇 벌 되지 않습니다. 아내와 아들은 패셔니스트입니다. 옷도 잘 입고, 의류매장 활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애절합니다. 집에서 나올 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예뻐 보이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다죠?  마음에 드는 옷을 입으면 자신감도 생기고 자존감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폐포파립(敝袍破笠)'이란 한자 성어가 있습니다.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거친다'는 뜻으로 연암 박지원의 한문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을 묘사한 말입니다.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겠으나 사람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중시하고자 할 때 사용되고, 겉으로는 남루하거나 가난해 보일지라도, 내면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남산 아래 묵적골에 살던 허생은 아니라도 가치와 이상을 더 높게 평가하는 삶의 방식은 나와 얼추 맞는 것 같긴 합니다.


  나이가 들면 힘도 없어지고, 체격도 왜소해집니다.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지요. 저도 어느새 나이가 들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초라해 보이고 싶지 않고, 떳떳해 보이고 싶습니다. 남루하지만 고결했던 묵적골의 허생이 아니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변부자에게 돈 만 냥을 꾸어 백만 냥의 수익을 낸 허생이 부럽습니다. 밸런스게임에서 '머리숱과 좋은 차'에 자존심을 지켜내려는 제 속내가 결국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오늘 현장에서 일하는 작업자 안전모에 같은 성씨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 " 아~! 저랑 같은 성씨네요 " 말을 내뱉고 바로 실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려시대 개국공신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듣기 어려운 족보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 아 그러시군요! 멋지십니다. " 가까스로 마무리지어 돌려보내고 자리에 앉아 없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커피 한 잔을 합니다. ^^ 후~~


  머리숱이든 자동차든, 끊어지지 않는 족보의 자랑도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초라함'을 감추기 위한 심리적 투사(投射)가 아닐까요?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으니 과연 '폐포파립'의 누추함보다 한 수 위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로 살아가는 오늘'이란 매거진을 꾸려가면서 '성도(聖徒)'로 살아가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태생적으로 멋을 안 부리기에 그나마 다행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숭고한 뜻과 고결함은 없더라도 가치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것'을 선택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머리숱은 조금 많아졌으면 합니다.
제발.


매거진의 이전글 잡혀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