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가져가겠다는 딸

기억을 넣어두는 장소

by 위엔디

5살 때 우리 집은 서울에서 구멍가게를 했습니다. 입구에는 '아이스 꿀밤' 하드통이 하나 있었습니다. 노란색 고무튜브 속에 얼음과 소금을 채워 냉동기능을 갖도록 했죠.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사탕이 담긴 유리 상자가 놓여있어서, 오가며 몇 개씩 꺼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죽잠바를 입고 장난감 플라스틱 안경에 하늘색 장화를 신고, 카메라 앞에서 멋지게 폼 잡고 찍은 사진이 그때를 추억하게 만듭니다.


우리 집에는 '차단스'라고 불리던 서랍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그냥 서랍장이지만, 그땐 다들 그렇게 불렀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차단스는 일본말 '단스(箪笥)'에서 온 말이고, 여기에 '차'라는 말이 덧붙어 굳어진 표현이라고 하더군요. 우리 집 차단스는 주로 옷가지를 넣어두는 용도였습니다. 위쪽에는 작은 서랍이 세 개, 아래로는 다섯 칸의 수납공간이 있었는데, 가게 뒤쪽 목공소에서 목수가 직접 짠 가구라 유난히 단단하고 묵직했습니다.


여러 번의 이사를 통해서도 항상 그 차단스는 우리 가족과 함께였습니다. 제 기억으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끼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누나가 맛난 걸 숨겨놓았던 장소도 거기였고, 어버이날이 돌아오기 전 카네이션을 미리 사놓고 몰래 간직한 장소도 그곳이었습니다. 가끔은 민망한 성적표를 넣어두고 진땀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할머니들이 대대로 내려오는 자개장이나 화장대를 무슨 보물 다루듯 아끼는 것도 이해가 되는 것이, 가구 하나에 삶이 묻어있고, 인생이 녹아있기에 쉽사리 손에서 떠나보내기가 싫은 탓일겁니다. 저는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아무것도 아닌 서랍장을 이토록 오래 기억하고 있다면, 내게 있어 그 차단스는 이미 가구 이상의 가치로 남아있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어릴적 구멍가게 앞에서 찍었던사진에 아이스 꿀밤 하드통이 보입니다. / 오른쪽 사진은 친구와 피아노를 연주하는 딸의 뒷모습을 아내가 촬영하고 있네요.

어느 날 우리 딸이 엄마랑 전화통화를 합니다.

"엄마! 나 결혼할 때 엄마 피아노 내가 가져갈 거야!"


딸아이가 집에 있는 엄마 피아노를 먼저 '찜'해 놓네요. 아내가 결혼할 때 친오빠로부터 선물 받은 파란색 피아노입니다. 지금은 건반으로 연습을 많이 하기에 아파트에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딸이 가끔 집에 친구를 데리고 올 때면 그 피아노에 앉아, 한 두곡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아노를 맘에 두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옅은 미소가 지어집니다.


제가 그렇게 오래 기억하고 있었던 '차단스'가 우리 딸에게는 '피아노'였던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피아노 치던 엄마의 뒷모습, 동생과 앉아 '젓가락 행진곡'을 신나게 연주했던 기억들, 그 위에 앉아 책도 읽고 건반도 만지고, 울고 웃고, 함께 했던 모든 기억을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시절 내 삶을 담고 있던 차단스가 그랬듯, 언젠가 딸의 삶 어딘가에는 그 파란 피아노가 놓여 있을 것입니다. 가구나 악기가 아니라, 기억을 넣어두는 서랍 하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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