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병오년'

인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날

by 위엔디

십수 년 전의 일이다. 막내 이모가 환갑 잔치를 한다고 한다. 요즘은 칠순도 안 하고 팔순 잔치도 여행으로 대신할 정도로 장수 시대가 된 마당에 환갑 잔치라니 민망함은 우리의 몫이었다. 그래도 이모네 형제자매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막내는 언니 오빠들 경조사 챙기느라 자기 것은 챙기지도 못했어. 우리 다 죽으면 쟤는 누가 챙기겠어! 우리 있을 때 잔치라도 해 주자!"
환갑 잔칫날, 집안 어르신들이 모두 모이고, 나를 포함한 조카들도 참석했다. 가장 나이 어린 이모 앉혀놓고 환갑을 축하하다고 '만수무강'한다고 하니 환갑 잔치가 아니라 재롱 잔치였다. 그래도 사뭇 진지한 이모의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올해는 내가 환갑이다. 병오년(丙午年)에 태어나 60 갑자(甲子)를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기분이 묘하다. 세월여사(歲月如梭)라는 말이 있다. 세월은 '베틀의 북'처럼 빠르게 지나간다는 뜻이다. 순식간에 60년이 흘렀다. 이모가 환갑 잔치했던 때와는 또 다른 세상이 되었다. 70세가 되어도 노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초장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럼에도 내 또래 동기들은 이제 퇴직 나이가 되면서, 대부분 일터에서 밀려나는 시기다. 퇴직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편치 않다.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은 그래도 낫지만, 여유가 없는 사람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퇴직 후 소득 공백이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은퇴 후에도 생계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불완전한 은퇴도 간과할 수 없다.


퇴직이 사회로부터 '밀려나는 것'이라는 서글픈 마침표라면, 한편으론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은퇴는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오래 미뤄두었던 마음의 서랍을 다시 여는 순간이다. 출근 시간표와 직함 속에 눌려 있던 이름 하나가 이제야 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어릴 적, 밥벌이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져 접어 두었던 꿈들이 다시 꿈틀거린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글을 쓰고 싶었으며,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마음들이다. 그 꿈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살아갈 순서를 양보했을 뿐이다.


정년이라는 문턱을 넘어서자 사람들은 뒤돌아 자기 삶의 원고를 다시 펼친다. 이제는 늦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퇴근 후 플루트 연습이 한창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동호회 모임에서 연습도 하고 작은 음악회도 열면서 행복해한다. 사실 우리는 다시 젊어지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하고 있다. 은퇴 이후의 시간은 여백이 아니라, 가장 갖고 싶었고 아껴둔 내 보물을 꺼내는 날이 되는 것이다.

아내는 요즘 퇴근 후, 일주일에 한두 번씩 플루트를 연습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해한다.

병오년에 태어나 60번을 돌아 다시 병오년이 되었다. 인생은 원을 그리듯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나는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은 사람이 되어 있다. 두 번째 삶은 지금, 여기서 다시 시작된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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