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코제트 (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창간호 일부 )
*이 글은 2014년 가을에 발행된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창간호에 실린 글입니다.
어떻게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LG 트윈스를 응원하는 여자와 LG 트윈스를 응원하지 않는 여자. 삼성이나 두산을 응원하는 팬들은 절대 모를... 어느 팀 팬이냐 묻는 질문에 타 팀 팬들의 연민과 조롱이 섞인 눈빛을 한 몸에 받는 팬. 내팀내(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DTD : Down Team is Down)라는 저주에 빠졌던 10년의 세월, 무려 11년간 4, 5월에는 치고 올라가 희망을 선사하다가 매번 여름이면 병든 닭 마냥 시들시들 내려가 정작 가을에는 야구를 하지도 못했던, 희망 고문과 암을 유발할 만큼의 극도의 긴장과 스트레스를 동반하여 “발암(發癌) 야구”의 상징이라는 LG 트윈스 야구.
서울의 ㄷ여자고등학교. 때는 바야흐로 1994년 가을. 나의 모교에는 유일하게 과학실에만 TV가 있었다. 과학실로 말하면 그해 여름 미국 월드컵을 보느라 24인치 정도 되는 TV 앞에 한 학급 45명이 다닥다닥 들러붙어 있던 문제적 장소였던 것이다. 나와 친구 2명, 우리는 정규 수업 시간이 아닌 야자 시간에 교무실에서 몰래 과학실 키를 슬쩍했다.(예외란 없다. 학창 시절 대부분의 사건은 문제적 시간, 야자 때 일어나지 않던가.) 깜빡깜빡... 우리는 과학실의 빨간색 센서등을 보며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친구 2명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 무대를 보기 위해서, 그 사이에 나는 10분마다 한 번씩 채널을 돌려 포스트 시즌 LG와 해태의 경기 스코어를 확인하기 위해서. 서태지 파의 쪽수에 밀려 비록 경기는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거슬러 올라 가면 아마 그때부터 나의 야구 사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다.
1994년은 야구장이라는 공간이 소주병 던지는 아저씨들의 무대에서, 교복 입은 여중고생 오빠 부대가 등장한 기념비적인 시즌이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 바로 나의 팀 LG 트윈스다. 그 당시의 건강한 여고생답게 나는 연세대학교 체육관과 숙소, 잠실 학생체육관을 오가던 농구장 오빠 부대원이었고, 장충체육관까지 배구를 보러 다니고 짬짬이 야구까지 보던 통에 어느 해보다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었다. 아빠가 MBC 청룡을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야구를 봐왔지만, 흰 줄무늬에 스판덱스 바지를 입고 하이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고졸 신인 김재현의 모습에 반해버린 나는 농구대잔치가 시작되기 전과 월드컵이 끝난 사이 야구의 늪에 풍덩 빠져 버렸다. 그렇다!! 그것은 오로지 김재현이란 선수의 귀공자 같은 얼굴과 허벅지 근육 때문이었다. 당시 LG는 신인 3인방의 절대적인 인기가 한몫했다. 1루 수비를 할 때 부담스러운 금목걸이를 하고 긴 다리를 쫙~ 찢으며 볼캣치하던 서용빈이 있었고, 나름 귀염상으로 유격수 포지션에서 기가 막히게 수비하던 1번 타자 유지현. 그리고... 주로 2번 타자로 나섰지만 차세대 거포 가능성을 가지고 등번호 7번을 달며 핸섬한 마스크로 신인 최초 도루 20개, 홈런 20개를 넘는 20-20 클럽을 달성했던 김재현이 있었다. 아! 쉴 새 없이 속사포로 터져 나오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이 야구를 안 보는 언니들에겐 과연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 그 시절의 그 마약 같은 약발 덕분에 지난 20년간 갖은 마음고생을 안고 살아온, 어느덧 30대에 접어든 LG 팬 언니들에게는 여전히 LG 야구는 버리기도 뭣한 속만 썩이는 원수 같은 자식 같달까.
지금이야 케이블 채널에서 전 경기를 동시에 중계해주고 DMB로 이동하며 경기를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내가 여고생이던 당시엔 지하철 가판대에서 500원 하는 스포츠 신문을 사들고 그 날의 전경기 분석표를 펴놓고 타율과 타구 분석표를 보며 머릿속으로 경기를 상상하던 시절이었다. 직접 경기장에 가거나, 가끔 방송국에서 미친 척하고 중계를 해주면 경기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매일 피 같은 500원을 바쳐야 했던 그때를 지나... 2002년 모두가 예측하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LG 트윈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6차전. 이 경기를 지면 최종 우승은 삼성에게 돌아가는 그 날! 김재현 선수가 절뚝거리며 타석에 들어섰다. 고관절 괴사라는 희귀병으로 그는 걷기도 힘든 상황, 선수 생명의 위기였던 그때. 아무도 결승에 가리라 예상하지 못했던 전력의 LG를 이끈 김성근 감독은 그를 대타로 넣었고, 평소라면 2루타였을 안타를 치고서 김재현 선수는 절뚝거리며 1루에 들어섰다. 그 안타로 득점을 기록하였지만 아쉽게도 우승은 삼성에게로 돌아갔다. 뭔가 오합지졸들이 외인구단을 형성해서 졸지에 결승에 오르고, 희귀병에 걸린 비운의 스타가 팀의 마지막을 구해보고자 나서는..... 영화보다 영화 같은 가슴 벅찬 이야기가 아닌가! 2002년의 승부는 여전히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로 남을 명승부 중에 하나이다. 어쩌면 신바람을 몰았던 1994년의 약발보다 내게는 2002년 의 드라마틱한 한국시리즈가 이 빌어먹을 팀을 20년간 응원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작년 가을야구의 저주를 풀자마자 다시 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 팀을 놓지 못하는 건 바로, 내가 승리가 아닌 야구 그 자체를 즐기고 있고 야구를 즐기기 위해 선택한 팀이 그저 LG라서가 아닐는지. 이젠 더 이상 일희일비하며 혈압 상승에 뒷목을 부여잡기보다는, 퇴근 후 집에서 TV 중계를 보며 점수 날 때마다 남편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맥주와 함께 하는 야구가 더 좋아지는 요즘이다.
2011년 뉴욕비평가협회 남우주연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던 영화 <머니볼>에서 극 중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구단 단장이었던 빌리 빈(브래드 피트)의 대사 중 이런 것이 있었다. “It’s hard not to be romantic about baseball.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어.)” 흔히 야구를 9회 말 투아웃부터라고 한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매일 경기에 나와 승부를 던지는 야구는 전장의 스펙터클함이 느껴지는 축구보다는 다이내믹하지 않지만 매이닝, 매 경기마다 그간 쌓인 확률이라는 숫자로만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희로애락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정말 마지막 9회 말까지 언제 뒤집어질지 모르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무적의 구원 투수가 어느 날은 마지막 9회에 등판하며 역전을 허용하고 패배를 주기도 하고, 팀의 에이스였다가 도박 브로커와 승부를 조작한 사실이 발각되어 선수 생명이 끝난 투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12년간 2군에 배터리 투수로만 지내다가 우연찮은 기회에 출장한 후 주전을 꿰차고 승승장구하는 선수도 있고, 메이저리그까지 갔던 선수가 락 밴드 보컬로 전향하기도 하고, 발 빠르고 재치 있는 플레이로 사랑받던 선수가 제 성질을 못 이겨 주먹다짐 몇 번 후에 이제는 야구장 앞에서 닭강정을 팔기도 하며, 10년을 유망주로 지내며 제 실력을 못 보여주던 선수가 팀에서 방출되어 헐값에 하위 팀으로 가더니 홈런왕을 2년째 이어가기도 한다. 교체되어 들어온 선수에게는 항상 다음 이닝에 아웃을 잡는 수비를 하게 되는가 하면, 수비 실수를 한 선수가 다음 공격 때 꼭 타점을 올리기도 하고, 호수비를 한 선수가 타석에 서서 3년 만에 홈런을 치기도 한다. 타율이 4할이 되는 타자도 만나기만 하면 헛스윙만 당하는 투수가 있는가 하면, 1점을 꼭 내기 위하여 희생 번트나 외야 플라이를 날려도 홈에서 아웃당하기도 한다. 크고 작은 플레이들에 깨알 같은 두뇌 싸움과 변수가 존재하니 야구는 머리 나쁘면 정말 잘할 수가 없다. 머리뿐이겠는가. 매일매일 꾸역꾸역...... 야구는 우리네 인생처럼 정답 없이, 가끔은 의표를 찌르는 선택으로 승리를, 또 가끔은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패배를 하루하 루 선사한다. 이러니...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오늘부터는 내일 열릴 올스타전 휴식기이다. 오늘은 대한민국 야구선수들이 1년 중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는 하루가 될 것이다. 나 역시 내일 다시 뛰게 될 인생에서 또 한 라운드 걱정일랑 잠시 내려놓고, 매 경기마다 다른 희열을 맛볼 수 있는 팀이 있다는 사실에나 감사하며, 지나온 20년과 마찬가지로 10년 뒤에도 LG 유니폼을 입고, 함께 욕하고 눈물 흘리고 기뻐할 날을 꿈꾼다. 앞서 언급한 영 화 <머니볼>의 OST 중 구단 운영으로 고민하는 브래드 피트에게 딸이 들려주는 노래, Lenka의 “The show”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나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인생의 중간에 서 있고 선택은 힘들지만 그저 쇼처럼 즐기자고. Just enjoy the show.
나는 오늘도 야구를 본다. 오늘 지더라도 내일 또 인생의 경기에 나설 수 있기에....
코제트 언니는 11살 때부터 88 서울 올림픽 올 가이드북으로 종목별 규칙과 메달 유망주를 분석했던 스포츠 덕후였으나, 현재는 운동선수들의 몸을 투시하는 재미로 스포츠를 관람하는 30대 후반 워킹맘입니다.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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