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덕질/ 글 정재롱 (독립잡지 언니네 마당 Vol.09 中)
나의 덕질의 역사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최초의 덕질은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한 만 3세. 움직이며 말하는 그림에 탄복하며 ‘내가 이러려고 세상에 태어났구나’를 깨닫고 타액을 흘리며 만화에 빠져들었다. 1980년, 이미 미래를 예견 하샤 다시 보기 시스템 이 없음을 탄식하며 끝난 만화를 다시 보여달라며 근엄한 땡깡을 부렸다고 한다.
10세, 방송심의규정을 심하게 준수하는 밝은 만화와 찰나의 방영시간으로 인해 끓어오르는 만화에 대한 갈증을 『보물섬』과 어린이 신문의 <꺼벙이>로 달래며 솔방울로 총알을 만들고픈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우울한 어린 시절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15세, 동생을 채찍질하여 성일중학교에서 공수한 손바닥만 한 콩콩 코믹스 해적판본으로 <드래곤볼>과 <쿤 타맨>, <용소야>를 깨치고, <시티헌터>로 문화적 세계화를 이룬 후 급기야 만화적 친일에 이르게 된다.
18세, 나는 자율학습 시간에 <굿바이 미스터 블랙>을 읽다 그만 잔학한 학주학생주임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교무실에 끌려가 4시간 동안 공급책을 말하라고 갖은 고초를 당하지만, 굳은 결계로 그 뜻을 꺾지 않고 더욱 만화책 읽기에 매진해 나아간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대여점의 성업과 더불어 나의 만화인생은 <창천항로>의 길을 걷게 된다. 만화책의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다음 권을 빌리러 새벽 1시에 대여점으로 전력 질주해 본 인간은 만화의 흡입력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된다. 또한 1일 3권을 기본으로 매일매일 방대한 양의 만화책을 다독하며 80-90년 대 일본 문화의 농축된 정수를 받아들였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를 사랑하는 3가지 방법으로 영화를 많이 보고, 영화에 대해 글을 써보고, 영화를 찍어보는 것이라 했던가. 99년 여름, 나는 드디어 부천의 '작업실'이라 쓰고 '골방'이라 읽히는 공간에서 만화를 그 려보겠다며 마음 맞는 친구들과 출사표를 던졌다. 호기로운 출발과 달리 결과물 없이 떡볶이만 철근같이 씹어 먹으며 살만 쪄가던 나날들. 부지런히 작업하며 성과를 내는 다른 동료들을 보며 ‘아! 게으른 인간은 만화가가 될 수 없구나’를 떡볶이에 순대를 곁들인 어느 날,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이후 <콩쥐>라는 두 페이지 분량의 희대의 괴작품만 남기고 절필, 생업에 종사하며 취미로 만화 읽기에 더욱 정진하였다. 덕분에 굴욕을 참으며 번 돈으로 <짱구는 못말려> 전권을 사서 읽는 사치를 부리며 덕력을 높일 수 있었다.
때로는 만화책이 친목을 도모하는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같은 작품을 읽은 사람을 만나면 금세 마음의 거리가 좁아지기도 하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은밀히 접근해 중독성 강한 약을 파는, 아니 중독성 강한 만화책을 권하는 권모술수를 쓰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참 기나긴 시간이었다. 만화가 있어서 나의 생과 타인에 대한 이해가 풍부해졌다고 단언할 수 있으며 지금도 만화책으로 큰 기쁨과 위안을 받고 때로는 생의 방향을 위한 지침을 얻기도 한다. 강백호와 같은 나이에 운명적으로 <슬램덩크>를 만나 뜨거운 피를 나누고 <오렌지 보이>(<꽃보다 남자> 해적판 제목)의 황보명(츠쿠시, 구준표)과 정유나 (츠쿠사, 금잔디)를 응원하며 만화책으로 연애를 배웠다(아... 틀렸어). <기생수>로 인간에 대한 철학적 관용을 배우고, <생존게임>으로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의 생존법을 배웠으며, <신의 물방울>로 익힌 와인에 대한 얄팍한 지식으로 마구 잘난 척 할 수 있었고, <총몽>과 <미래 소년 코난>으로 재생에너지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어느새 나는 동갑이던 강백호(북산 고 1학년)의 나이를 가로질러 급기야 짱구 아빠(떡잎마을 거주 35세)를 보며 "35살이면 아가(baby)지"라고 중얼거리는 나이에 이르렀다. 그 사이 나의 만력은 증가하여 오덕후와 십덕후를 지나 만덕후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책등만 보고 재미있는 만화를 찾아내는 초능력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원치 않는 초능력을 대여점이 없어진 요즘에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사용하고 있다(만화 코너에서 아우라를 뿜으며 책 등을 노려보는 큰 여자가 있다면 그게 나다). 신이 주신 이 초능력으로 무천도사의 나이(350살 추정)가 될 때까지 만화 보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리.
정재롱 선정 명작 만화 추천목록
내 언니들을 어엿비 여겨 새로 명작 만화 추천 목록을 맹가노니 두루두루 돌려 읽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길 바란다.
독서 시 준비물 : 쥐포, 파울라너 맥주
코믹
사사키 노리코 작품들, 김진태 작품들, 짱구는 못말려, 요츠바랑, 다카하시 루미코 명작 단편집, 오카자키에게 바친다, 여덟, 주먹밥 통신
드라마
마스다 미리 작품들, 심야식당, 야마모토 귀 파주는 가게, present for me,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 도자기, 잘 자 뿡뿡, 지브리 작품들
병맛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멋지다 마사루, 크로마티 고교, 천체 전사 선레드, 유전자레벨검, 음주가무 연구소, 타로 이야기
SF 판타지, 공포, 19금
기생수, 백귀야행, 인어의 숲 시리즈, 이토 준치 공포만화 시리즈, 아이 앰 어 히어로, 사가판 조류도감, 기계장치의 사랑, 히스토리에, 드래곤 헤드, 심해어, 두더지, 그린힐, 고백, 총몽, 2001 Space Fantasia, 에비츄
언니네 마당 11호 "일은 합니다만" 텀블벅 펀딩 진행
https://tumblbug.com/sistersmag11
언니네 마당 9호 "하자보수"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91196033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