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낸 사람: 그리고 봄 / 받는 사람: 그리고 봄
당신에게...
이렇게 당신에게 글을 쓰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얼마만일까요? 열 몇 살, 스물 몇 살?
뭔가를 끄적이며 보내던 그 시기엔 투정처럼 당신에게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남겼었지요. 눈물 자국도 몇 방울 떨구고 그랬을 거예요. 중2병이라고 하나요? 당신이 그것들을 다 보관하고 추억하고 계시지 않아서 참 다행이에요. 그때는 누구든 나를 좀 이해해주기를, 흔들리는 내 마음을 잡아주기를 원했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 순간이 지나고 나니 역시 뭔가 그 시절의 흔적들을 남기지 않았던 게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요. 지금 생각하니 참 많이 부끄럽네요.
저는 과거를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 해요.
저에 관해서라면 사진도, 일기나 편지 같은 글도 잘 남기지 않으려 해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혹은 주체할 수 없었던 어떤 감정이건... 뭔가를 잊지 않으려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가 뭔가 미련을 남기는 것 같아서요.
그냥 지금, 여기의 나.
내 눈과 귀를 포함한 감각과 기억의 힘으로 남길 수 있는 것만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슥~ 지나가는 어느 날의 한 장면이라든가, 대화 중에 우연히 튀어나온 나에 대한 누군가의 증언들, 누군가가 우연히 찍어 놓은 사진을 통해 환기되는 기억들, 그리고 머릿속에 기억이 저장되는 것처럼 언젠가 느꼈던 감정들 또한 내 몸 어디엔가 남아서 일렁일렁 일어나는 그런 게 훨씬 애틋하지, 굳이 무언가에 의존하여 기억해내야 할 만큼 특별하고 중요한 어떤 것이 제게는 없답니다. 지워지면 ‘이제 지워졌나 보다’하는 거고, 어렴풋이 기억이 나면 ‘아! 아직 못 잊었구나’하는 거고...
그렇게 흐르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가장 저다운 것 같아요.
그렇게 흘러 흘러 오랜만에 당신을 마주하였지요.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았고,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였고, 웃음소리와 따스함이 가득한 전형적인 할리우드 가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완벽히 행복한 순간처럼 보였지요. 그런데 그 장면 속의 당신의 얼굴 위로 순간 스쳐 지나가던 표정 하나가 잊히지가 않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당신은 무언가가 몹시도 그립고 또 슬퍼 보였거든요.
생각해 보면 당신은 문득문득 그랬었지요. 당신을 이해해보려고, 당신에 대해 알고 싶어서 한걸음 당신에게 닿으려고 해도 당신에게 닿아지지가 않습니다. 당신이 단단하고 견고한 벽을 치고 있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마치 불투명한 기름막에 쌓여 있는 것 같아요. 손을 대면 엷은 기름막은 금방 흩어낼 수 있지만, 그 순간뿐. 어느새 당신과 나 사이에는 다시 막이 생기고 내게 당신은 흐릿한 실루엣뿐이네요.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것이 차라리 두껍고 단단한 벽이라면 당신을 더 이상 보지 않고 그렇게 잊고 살거나, 아니면 벽을 부수고 당신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을 텐데,
당신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눈에 보이면서도 닿을 수가 없습니다.
잡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진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너무 궁금합니다.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당신... 괜찮은가요?”
그리고 봄 언니는 굽은 허리와 짝짝이 어깨를 가진, 찬바람 부는 가을부터 시작되는 수족냉증으로 겨울을 죽어라 싫어하여 언제나 봄을 기다리는 봄 바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