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시계는 끝이 있다
드라마의 대명사 《모래시계》
나에게 드라마의 대명사는 《모래시계》이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귀가시계'라고 불릴 정도로 거의 전 국민의 시선을 TV에 붙잡아맸다. 1995년에 방영했으니 벌써 근 30년이 되었다. 그동안에도 좋은 드라마는 숱하게 많았지만 이 드라마만큼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은 드라마가 또 있을까 싶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을까?
우선 작가를 꼽고 싶다. 영화는 감독이 만들고 연극은 배우가 만들고 드라마는 작가가 만든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드라마에서는 연출가도 배우도 중요하겠으나 극본이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다. 《모래시계》의 작가는 송지나이다. 그녀는 이 드라마 이전부터 이미 명성을 얻은 작가였다. 《모래시계》의 연출가 김종학과 이전에 《여명의 눈동자》를 함께 만들었다. 이 작품은 김성종의 대하소설을 각색한 것이다. 원작은 당시에 대중들이 잘 몰랐던 위안부와 일제의 생체실험부대, 팔로군 등의 실상을 밝혀서 화제를 모았고 베스트셀러였으나 작품성 면에서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오히려 송지나의 극본이 더 찬사를 받았다. 영화든 드라마든 원작을 뛰어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여명의 눈동자》는 원작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송지나가 《모래시계》에서 또다시 힘을 발휘했다. 많은 좋은 대사들이 있었으나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유감이다. 그렇지만 지금도 시중에 떠다니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나 지금 떨고 있냐?" 마지막 무렵에 주인공인 태수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하는 말인데, 이때의 순간 시청률이 무려 74.4%였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당연히 연출, 연기를 꼽겠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요소들을 갖춘 드라마는 많다. 《모래시계》는 그 3가지 요소도 탁월했지만 무엇보다도 시의적절한 시대배경이 한몫했다. 이 드라마는 현대 대한민국의 민주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은폐되었던 대표적 사건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우리는 그저 언론에서 보도되는 대로 광주에서 간첩들의 사주로 폭도들이 난동을 일으킨 거라고 생각했다. 이상하긴 했다. 그때 우리 집은 조선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당시의 어느 날인가에 군데군데 기사가 지워져서 그냥 빈 채로 있는 걸 보고 어린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대표적 보수신문조차도 그랬으니. 물론 그때 그랬던 기자들은 바로 이어서 독재정권이 언론 통폐합을 시키면서 다 해고되고 직장에서 쫓겨난다. 그렇게 은폐되었던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이후 외신과 지역 언론과 용감한 시민들에 의해서 조금씩 진실을 드러내던 참이었다. 대학생 오빠들을 통해서, 또 내가 대학 가서 직접 본 영상물들과 책자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들. 그러나 안 믿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안타까웠는데 저렇게 공공물인 TV로 보니 속이 다 후련했다. 물론 한계는 있었지만. 광주뿐만 아니라 삼청교육대,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는 언론, 각종 공작을 하는 안기부, 위에서 시키면 있는 죄도 없애버리는 검찰도 나온다. 물론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정의로운 검사도 있지만 그는 나중까지 타락하지 않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대를 거쳐 90년대는 각종 민주화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지던 시대였고 과거의 비리들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었다. 그런 시대의 흐름에 《모래시계》가 올라탔고 폭풍이 된 것이다.
얼마 전에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이 방송되었다. 드라마 대신 그 원작 소설을 봤다. 이 소설에는 모래시계처럼 때가 되면 끝나는 정권 대신, 현재의 거대한 권력이 돼버린 재벌에 헌신하는 언론과 검찰이 나온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제는 스스로 또 하나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모든 권력은 유한해야 한다.
30년 후에 지금의 시대를 담아낸 ‘모래시계’가 나온다면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