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에서 사라지는 것들

#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 #17

by 지친 잉어

헬스장에서 도둑 없는 도난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요즘처럼 도처에 CCTV가 깔려 있는 세상에서 도둑질을 하기도 쉽지 않은 환경이다. 게다가 한국은 카페에서 노트북을 두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 정도로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아직은 돈독히 살아있는 사회다. 옆자리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지갑이나 스마트폰 등 귀중품을 두고 잠시 자리를 비우면 슬쩍 곁눈질하면서 몰래 망을 봐주기도 한다. 아직도 소매치기가 일상적으로 살아있는 나라에서 잠깐 여행이라도 하고 오면 한국인들의 의리와 도덕성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헬스장 내에서 도난 사건으로 볼 만한 일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헬스장에서 훔쳐갈 만한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수건? 운동복? 설마 아령 따위는 아니길 바란다.

처음 면접을 본 날, 전해 들었던 바로는 '가위'였다. 가위라니, 너무 뜬금없다.

다이소에서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한 물건일뿐더러, 헬스장에 다닐 정도의 자금이 있는 분이라면 살림살이가 어렵다거나 해서 집에 가위 하나가 없을 리는 없다.

매니저님이 들려준 일화에서 해당 회원님은 잠시 가위를 빌리겠다며 사용한 후, 제자리에 돌려놓는 대신 자연스레 본인의 가방 안으로 넣었다고 한다. 눈앞에서 범행(?)을 목격한 그는 다행스레 바로 그 자리에서 가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뒤이어 자기도 모르게 가방에 넣어버렸다는 회원님의 뻔뻔스러운 변명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일화를 전해주는 그는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도둑맞을 뻔했다던 그 가위를 직접 사용하다 보니, 유난히 잘 잘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운 날은 빨래를 질기게 고정시키고 있는 밴딩끈을 거침없이 싹둑 잘라내었다. 다른 가위는 힘이 많이 필요했던 반면 이 가위는 손가락에 크게 힘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탐날만했다.

본인도 모르게 가위 쥔 손이 가방으로 들어갔는지 아니면 정말 훔쳐갈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하마터면 다른 집으로 강제 입양 당할 뻔한 가위를 무사히 지켜낸 사실을 떠올리며 이마를 짚는 매니저 님의 얼굴을 보며, 가위가 제자리에 잘 꽂혀 있는지 오고 가며 늘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는 동안 도둑맞을 뻔한 헬스장의 살림살이들은 조금 더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휴지, 비누, 로션 등 기본적인 비품들을 관리하는 것 또한 나의 업무 중 하나였다.

틈틈이 재고량을 확인하고 부족한 물품은 발주해야 했다. 배달 온 물건들은 주문대로 수량이 맞게 왔는지 꼼꼼히 세어보고, 주문내역을 보관한 영수증과 함께 점장님께 보고한다. 마지막으로 받은 물건을 창고와 비품실 등 각각 보관하는 장소에 알맞게 정리해 넣어두면 끝이다.

그리고 당장 사용할 소량의 물건들은 데스크 내 서랍에 따로 빼둔다. 아무래도 데스크와 창고까지는 거리가 꽤 되는 터라, 매번 창고와 비품실을 들락날락하기는 어려워 이런 보관방식을 택한 것 같다. 개인 사물함이 일렬로 나열된 긴 복도를 지나쳐 중간 문을 열고 나와 창고로 들어간 뒤, 다시 또 복도를 지나 방문을 한번 더 열어야 했으니 말이다. 이렇다 보니 창고에 다녀오는 길은 결코 짧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데스크는 사람 없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날 사건의 발단은 창고에서 서랍으로 물건을 채워 넣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샤워실에 비누를 부스 칸 마다 채워 넣은 후, 데스크 서랍에 보관해 놓을 비누를 가지러 창고로 향했다. 온 김에 휴지도 챙겨서 다시 나왔다. 비누는 개별 포장되어 있어 비닐을 하나하나 미리 까서 박스에 담아놓는 작업이 필요했다. 비누를 뜯을 때마다 향긋한 가루가 날리며 코 점막을 간질였다. 연신 터져 나오는 재채기 바람에 밀리는 포장껍데기가 수북하게 쌓여갈 즈음, 한 회원님이 내게 관심을 보였다.


"이거 비누 하나에 얼마씩 해?"

"대량 주문해서 받는 거라 개당 120원 정도일걸요?"

"어머, 너무 싸네. 나한테 몇 개 팔면 안 될까?"


끄응.

가 지금 헬스장에서 일하는지 돗때기 시장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중인지 순간 분간이 어려웠다.

어느 쪽이 됐든, 난 비누를 팔 권한 따위는 없었다. 그건 헬스장 메뉴에 없으니까.



"우리 집에 남자들이 많아. 남편에 아들 둘이서 써 대니까 비누가 너무 빨리 떨어지는 거 있지. 그냥 마트에서 사면 얼마나 비싼지 알아?"


알다마다요. 저도 세균으로부터 면역력을 지키고자 비누를 쓰는 문명인이랍니다.


"저희가 이걸 정기적으로 배송받는 거라서요. 재고가 일찍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요."


내가 직접 그때그때 발주하는 거니 정기적으로 배송받는다는 건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비누를 팔아달라는 생떼를 부리기 전에 최대한 그럴싸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납득시켜야만 했다. 아무래도 헬스장에 와서 는 스킬이라고는 영업보다 거짓말 같다. 즉석에서 술술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는 창의력과 순발력.


"에잉, 아쉽네. 사장 오면 더 주문 못 하냐고 물어봐봐. 알았지?"


사장이 절대적인 신 급으로 권력자로 여겨지는 이 신성한 헬스장에서 나는 인간들의 소원과 기도를 전달하는 메신저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의 지시대로 행동할 마음은 비누가루만큼도 없지만, 일단 그리 하리라 약속하는 시늉을 했다. 그래야 나도 내 할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니, 또다시 선의의 거짓말을 할 수밖에.


그러나 회원님은 기도의 응답을 전해 들을 때까지 넉넉한 인내심이 없으셨던 모양이다.


슬슬 마감 시간에 가까워져 탈의실을 청소하러 들어갔을 때였다.

밀대로 머리카락을 쓸어 모으고 젖은 수건과 운동복이 꽉 찬 포대만 갈아치우는 단순 업무가 전부인 탈의실 안에서 5분 이상 머무르는 일이 잘 없다. 그래서였을까. 회원님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이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회원님의 손에는 익숙한 노란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수건에 감싸져서 들려 나온 그 물건은 때수건도 아니고 속옷자락도 아니며 바디워시볼도 아니었다.

바로 비누였다.

헬스장을 이용하는 모두를 위해 서비스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그 비누말이다.


매일매일 비누 껍데기를 까서 상자 가득 채워 넣는 나로서 그 비누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내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을까.

비누 도둑이 되기에는 간이 작은 사람이었는지, 아직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은 내게 먼저 고해성사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우리 남편이랑 아들한테 사주기 전에 한번 써보라고 할까 해서. 쿠팡 같은 데서 대용량으로 시키면 어쨌든 값은 훨씬 쌀 거 아냐. 근데 막상 써보고 나니 향이 별로라느니, 맘에 안 든다느니 하면 어떡해."



아하, 그러니까 지금 비누를 구입하기 전 제품이 어떠한가 가족들의 심사를 거치기 위한 샘플 비누가 필요하셨는데 그걸 우리 헬스장에서 챙겨가시려던 참이었단 얘기인 거죠? 변명 잘 들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이미 땅콩 훔치다 딱 걸려 민망해진 다람쥐 꼴이 된 회원님은 비누를 자발적으로 샤워실에 가져다 두셨다.



도둑질에 관해서는 내가 간접적으로 목격한 건 이 정도뿐이다.

사실 비누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티가 엄청나지도 않을뿐더러 막대한 재산 손실을 입히는 것도 아닐 테다. (물론 가져가는 사람이 많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다른 회원님들의 제보에 따르면, 운동복도 가져가고 수건도 가져가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백번 양보해서 옷이야 집에서 홈웨어로 대충 입는 용도로 쓴다고 쳐도. 수건은 위생상 께름칙하지 않을까 싶은데. 대체 왜 훔쳐가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용하라고 제공하는 물건은 그 시설을 이용하는 동안 사용하도록 둔 물품들이다. 시설 밖으로 들고나가는 순간 절도 행위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왜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고작 비누 하나라며 둘러댈 거라면, 고작 비누 하나쯤은 직접 사는 게 맞지 않을까.


나는 그녀가 비누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걸 어색한 웃음으로 지켜본 뒤, 탈의실을 나와 헬스장 내부를 둘러보았다. 운동 기구들이 모두 하나같이 거대하고 무거워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선택받은 기구들이 하나둘씩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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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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