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러닝머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2)

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 #8

by 지친 잉어

1편은 아래의 주소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wearycarp115/7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내 신발을 벗어서 책상 아래에 넣어두고는 꼬질꼬질하게 때가 탄 슬리퍼에 발을 꽂아 넣었다. 멀쩡한 내 신발을 두고서 여러 사람의 발 때가 묻은 슬리퍼를 신고 싶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 또 납치당한 건 아닌지 오고 가며 눈여겨보는 일이 더 성가셔서 차라리 신어버리기로 선택한 결정이었다.


설마 신고 있는 걸 벗어달라고 요구하는 회원님은 없겠지. 나름 꾀를 잘 부렸다고 생각했던 그때,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 지나가는 내 발에 붙들린 슬리퍼를 보시고는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그걸 왜 아가씨가 신고 있어? 탈의실에 들어갔다가 잠깐 화장실을 갈 때 늘 신던 거였는데 그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사라져서는 내가 그 슬리퍼를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지금 다시 신발 신고 나왔다가 또 벗으러 들어가고 다시 신고. 아주 불편해 죽겠네 그래. 얼른 도로 갖다 놔!"



저도 지금 신고 싶어서 신은 게 아닌데, 왜 저한테 화내세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가만히 혼나는 것도 억울하다.

직원용이라 여겼던 슬리퍼가 알고 보니 모두의 전용신발로 많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하니, 어쩔 수 없이 도로 신발장에 가져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내가 자주 확인하는 수밖에.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 새로 등록한 계약서들을 다시 한번 영수증과 꼼꼼히 체크하랴 장부에 알맞게 기록되어 있는지 확인하랴. 청소도 하랴 수건과 옷, 각종 비품을 채우느라 슬리퍼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일을 마무리 짓던 중에 트레이너가 내게 와서는 맨발에 러닝머신을 뛰고 있으니 회원님 관리를 잘 좀 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슬리퍼 하나 때문에 참 여러 사람한테 혼난다.

신발장에 가 보니 정말로 슬리퍼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30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지런하게 포개두었던 슬리퍼를 범인은 알로까게도, 내가 바쁜 틈을 노려 다시 데려간 것이었다.


이번에는 또 누구일까 범인을 찾아 나섰다. 설마 같은 사람일까? 설마는 언제나 예측에서 어긋나는 경우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뻔뻔스럽게도 어제 내게 경고를 받으셨던 회원님이 또 맨발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타 뒤돌아 걷고 계셨다. 내가 다가오는 낌새를 바로 알아차리고선 곧바로 전원 버튼을 눌러 끄셨다.


"아휴, 잠깐 신은 거야 잠깐. 러닝은 어차피 오래 안 할 생각이었어."


또 선빵을 먹었다. 내가 어떤 이유로 당신을 찾으러 왔는지 알면서도 고집스레 같은 행동을 반복하시는 이유에 짜증이 났지만 어쩌랴. 하지만 회원님은 그것 또한 이미 내다본 수였는지 어제와 달리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슬리퍼를 신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어제도 말씀드렸다시피, 안전상의 문제로 슬리퍼 착용하시고 러닝머신 이용하시는 건 안되세요. 그러다 다치시기라도 하면 정말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나는 이대로 물러날 수 없어 최대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가 슬리퍼를 가져다 신을 수밖에 없는 사연이 늘어졌다.


"내가 얼마 전에 무릎 수술을 했단 말이야. 의사가 그러는데, 맨발로 걷는 게 그렇게 좋다 그러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열흘. 열흘만 맨발로 운동하라 했어. 나라고 지금 좋아서 맨발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당연히 나도 예쁜 운동화 딱 신고 뽐내면서 걷고 싶겠지, 안 그러겠어?"


이러한 사연에 나는 감동받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무릎수술을 했다는 사람이 넘어져서 다치면 더 고생할 걸 대체 왜 모를까 싶어 이해가 안 가 가슴이 답답했다. 나도 질세라, 표정을 고쳐 짓고는 다정함을 가장한 상냥한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제가 단순히 규정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 회원님이 다치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죠. 무릎 수술도 하셨으면서 그러다 다치시면 운동은커녕 얼마나 생활이 불편하시겠어요? 이게 다 회원님 걱정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알고 보니 나 연기에 소질이 있던가? 쥐발톱만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이렇게나 즉석에서 잘 지어낼 줄이야. 걱정은커녕, 그녀가 계속해서 규칙을 어기다가 퇴관 조치를 당하면 오히려 더 고소한 결말이 아니겠는가.

때에 따라 페르소나 가면을 잘 이용하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가식을 잘 떠는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몰랐었다.


그렇게 텅 빈 진심에 그녀는 기분 좋게 호호호 웃더니, 알겠다면서 내일부터는 운동화를 챙겨 오겠다면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가셨다.




3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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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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