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러닝머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3)

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 #9

by 지친 잉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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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https://brunch.co.kr/@wearycarp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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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출근하신 점장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느 한 회원님이 여러 차례 주의와 안내를 드렸음에도 완전히 무시한 채 위험하게 운동을 하신다고 참새가 흘리고 간 좁쌀처럼 또로록 혀를 굴려 보고를 했다. 내 근무시간에 일어난 일인 만큼 나 스스로 해결하고 싶었으나, 나의 능력은 이미 그 한계에 다다랐으니 결국 보다 권위 있는 직급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만이 최후의 수단이었다.


어제 그녀는 내게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운동화를 챙겨 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약속을 지킬 것 같다는 믿음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나의 믿음을 저버리기를 바랐다. 지금껏 그래왔듯, 나의 어떠한 대응에도 무시로 외면했듯이 약속도 홀라당 까먹고 슬리퍼를 신고 러닝머신을 뛰기를 바랐다. 회원님이 다치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점장님의 눈에 직접 띄어야 그녀를 제대로 제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점장님이 다른 볼일을 보러 자리를 떠나기 전, 회원님이 어서 빨리 나타나기를 바라던 내 간절한 바람대로 그녀는 때맞추어 들어왔다. 인사를 건네려는 나와 눈이 마주친 회원님은 독심술사라도 되시는 걸까. 내가 오늘 무슨 계획을 짜고 왔는지 이미 다 꿰뚫기라도 하는 듯 그녀는 데스크에 두 팔을 겹쳐 올려놓고는 점장을 불렀다.



"아니 글쎄, 내가 맨발로 러닝머신 좀 탔다고 여기 이 아가씨가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돈 주고 다니는 헬스장에서 눈치가 보여가지고 영 운동을 못하겠잖아요."



허, 나는 그녀의 기발한 단어 선택에 또다시 선빵을 맞은 얼탱이가 입 밖으로 빠져 굴러가는 소리까지 들었다. 구박이라니, 당치도 않다. 지금껏 슬리퍼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들한테 내가 구박을 당했으면 당했지 내가 무슨 구박을 했다는 건지. 모두가 쾌적한 공간에서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나의 의무를 다했을뿐더러,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제지해야만 했던 나의 노력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양 눈썹을 팔자로 모아 만든 다음, 한 손은 이마에 갖다 대고선 간식 뺏긴 강아지 같은 울상을 지으며 점장에게 정말 속상해 죽겠다는 듯이 호소했다.


나는 점장이 그녀의 편을 들지는 않을지, 벌어진 입을 점장님에게로 돌려보였다. 이거 믿으시는 거 아니죠?


"내가 무릎수술을 했는데, 의사가 딱 열흘만 맨발로 걸으래잖아요. 내 말이 거짓말 같아서 못 믿겠으면 진단서라도 끊어다 줄게요."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건 내쪽이 아니라 그녀였다.

무릎에 어떠한 흉터 자국 하나 없는 깔끔한 피부 위로 수술받은 사실을 강조하며 자신도 맨발로 러닝머신을 타는 일 따위는 저지르고 싶지 않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지금의 상황이 매우 유감이라는 듯 그녀는 목소리를 한탄스럽게 뱉어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짜증을 부리던 그 얼굴은 어디에 넣어둔 걸까. 혹시 어디 아침 드라마에 조연 배우로 출연한 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니면 어디 극단 출신이던가. 그녀를 감정적인 목소리와 표정이 연기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잠시 빠져있던 내게 언제나 겸손하고 거만 떨지 말으라는 참 교훈이 아닐 수가 없다.



점장님은 진단서는 필요 없고, 다치면 책임지기 어려우니 운동화를 신어 달라는 말로 감정 없이 대응하셨다. 나이스 점장님! 저는 점장님이 제 편 들어주실 줄 알았어요.



"여기서 넘어지면 내가 다 책임질게. 다쳐도 아무런 피해보상 요구 안 하겠다고 서약서라도 쓰고 갈까?"


이번에는 한쪽 어깨를 살짝 빼내어 흔들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지금 애교 떠신 거예요? 나는 시시각각 바뀌는 그녀의 태도에 더 이상 어쩌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만 뻐끔거리며 듣고만 있었다. 짜증을 내었다가 곧바로 애처로웠다가 이제는 발랄한 애교까지. 혹시 감정 전환이 가능한 감정카드가 그녀의 마음 주머니에 꽂혀있기라도 한 걸까? 경극에서 가면이 바뀌는 속도보다도 빠른 그녀의 표정 변화는 정말 믿을 수 없는 실력이었다.


이쯤 되니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었다.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당당하게 나오니 점장님도 딱히 어떠한 조치를 더 취하기는 무리셨는지 그러시라며 보내드렸다. 매번 그러겠다는 것도 아니고, 일단 열흘이라는 기한까지 먼저 제시하지 않았는가. 그동안에 정말 사고라도 일어나면 그때는 또 어떤 가면을 꺼내 쓸지 모를 일이지만 당장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슬리퍼 쟁탈전에서 결국 패배했다.

그 사이 치열하게 뺏기고 빼앗겼던 슬리퍼의 때가 훈장처럼 더 더러워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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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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