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러닝머신: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1)

헬스장 클럽에서 만나요 #7

by 지친 잉어

헬스장을 다녀본 사람은 이미 다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실내용 운동화를 따로 착용할 것을 권한다. 바깥에서 온갖 흙먼지를 끌고 들어오면 청소가 힘든 주인장의 노고도 노고겠지만, 실내용 운동화를 따로 챙겨 오지 않아도 된다는 헬스장에 회원으로서 직접 다녀본 바 이는 사실 안전 문제이 더 크게 관여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몰상식한 사람이 슬리퍼를 신은채 러닝머신을 탈까?

한 치의 의심을 품어본 적이 없는 나의 순진함이 가소로워지는 날이 생겼다.



어느 날부터인지, 여자탈의실 신발장에 놓인 간이 슬리퍼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스펀지처럼 말랑하고 호떡처럼 얇은 재질의 슬리퍼로, 실제 신어본 바 그냥 걷기에도 썩 편한 착용감을 주지는 않았다. 해당 슬리퍼는 주로 내가 신던 것이다. 잠시 청소를 하러 탈의실에 들어갔다가 모자란 비품을 가지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가 도로 탈의실로 돌아가야 하는 짧은 동선 내에서 매번 신발을 고쳐 신기엔 번거로우니 탈화가 쉬운 슬리퍼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바나나잎으로 만든 신발보다도 못한 내구성의 슬리퍼를 대체 누가 신고 사라졌나.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탈의실 신발장에서 보았으니 그 사이 누군가가 집으로 가져갔을 리는 없다(가져갔으면 어쩔 수 없고...). 한 마리의 탐지견이 되어 헬스장 내부를 돌았다. 반바지 아래로 회원님들의 매끈하게 뻗은 다리만 집중적으로 훑고 지나가는 신종 변태 같은 모양새로 비쳤을진 몰라도, 내겐 범인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범인은 역시나 현장에 있었다. 기구들 사이를 쭉 돌아 나열된 러닝머신들 중 가운데 말라비틀어진 절편 같은 슬리퍼가 팔자 모양으로 벗어던져져 있었다. 그 앞으로는, 맨발로 씩씩하게, 그것도 뒤돌아 선 채로 꽤나 빠른 속도로 쿵쿵 걷고 계시는 회원님이 보였다.


기겁했다. 저러다가 잘못 넘어져서, 맨살의 발가락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러닝벨트 사이로 끼이는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될지. 잘못 넘어져서 머리카락이 끼이면? 잘려나간 발가락에서 피가 온 사방으로 튀는 장면에 비명소리까지 더 해진 그림이 눈앞에서 실현되기 전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갑자기 다가가면 혹시나 놀랄까 봐, 기구들 사이를 빠져나와 회원님을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쪽으로 우회해 접근했다. 혹여나 의도치 않게 상대방을 놀라게 하면 오히려 놀라 자빠져 사고를 일으키는 원인제공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고 싶었다.

다행히 내 의도대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날 발견한 회원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턱을 치들었다.



"왜? 나한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어?"



선빵을 당했다. 괜찮다.

아직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진 않았으니 살살 구슬리면 슬리퍼도 돌려받고 회원님은 맨발로 러닝머신을 뛰는 행위를 그치실 것이다.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회원님, 헬스장 내부에서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운동화를 신어주셔야 해요. 특히 러닝 머신 이용하실 때는 안전 문제 때문에 슬리퍼나 맨발 이용은 금하고 있어요."


회원님은 손을 휙휙 내 저으며 파리 쫓듯, 내 말들을 허공에서 지워버렸다.

눈을 돌린 채 굳건하게 발걸음을 뒤에서 앞으로 밀어 걸었다.


난감했다. 경고 조치를 취했으니 이후 신발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운동을 하다 다쳐도 나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안다. 혹시라도 다치게 되면, 그때 가서는 나에게 책임을 묻고 따지리라는 것을. 그동안 근무를 하면서 파악한 회원님들의 평균적인 성향에 따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싫지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탈의실에 두고 오셨나요? 지금 가져오시기 번거로우시면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삐-익.

그제야 그녀는 팔을 뒤로 돌려 정지버튼을 눌렀다. 서서히 속도가 줄어드는 러닝벨트에 맞추어 두 다리도 보폭이 커지면서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작동이 멈추자 그녀는 머신에서 폴짝 뛰어내려 슬리퍼를 신었다.



"아휴, 안 타면 될 거 아냐 안 타면."


인상을 팍 쓰며, 짜증 난다는 몸짓을 한껏 과장했다. 나는 어찌 됐든 내 말을 들어준 사실만으로도 꽤나 감개무량한 지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의 목적대로 그녀를 러닝머신에서 내려오게 만들었으니, 뭐 어떠랴.

그러나 그녀는 나의 바람대로 신발을 갈아 신으러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를 피해 웨이트 머신이 있는 구역으로 들어가 버리셨다. 그녀의 발밑에서는 발뒤꿈치를 따라가지 못하는 슬리퍼가 헐떡거리면서 회원님에게 질질 끌려갔다. 불쌍한 슬리퍼 같으니.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어쩐 일인지 평소와 답지 않게 상황이 쉽게 풀리었다. 끝끝내 인질로 삼은 슬리퍼를 풀어주지는 않으셨지만 그래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따라 주었으니. 이 정도면 진상치고 난이도 하급에 속하는 편이라 생각하고 그녀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나 이는 나의 단단한 착각이었다.

그 후로 일주일간 그녀와 슬리퍼를 두고 눈치싸움을 벌이게 될 줄은.





2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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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런치 작가 [지친 잉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