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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버금 May 06. 2023

레퀴엠 포 어 드림(2000)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 | 엘렌 버스틴, 자레드 레토, 제니퍼 코넬리

레퀴엠 포 어 드림(2000) | 대런 애러노프스키 감독 | 엘렌 버스틴, 자레드 레토, 제니퍼 코넬리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HUNGER

폭양 속을 유영하는 자아가 있다. 그들은 설익어 무르고, 이음새가 헐거우며, 무엇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그 곳에는 시간도, 무게도, 실체도 없다. 사위에서 쏟아지는 볕을 이불 삼아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외로움과 허기에 잠식당한 그들의 존재를 대변해 주는 유일한 증거는 그림자다. 검게 드리워진 그것만이 현실 세계에 남아 자아의 부재를 설명한다.


사라의 노년은 TV 앞에서 소비된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을 독립시킨 그녀가 자신의 일상에서 찾은 유일한 낙은 TV 프로그램을 보며, 초콜렛을 먹는 것이다. 평범했던 그들이 무대 위로 오르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스타로 재탄생 되는 전개는 그녀에게 희열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TV를 팔아 자신의 유흥비를 충당하려 드는 아들 해리로 인해 그녀의 감동은 번번히 무산된다. 사라는 지속되는 갈등 상황이 무척 버겁지만, 남은 가족이라고는 아들이 전부이기에 아들의 일탈을 믿지 않으려 한다.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그녀에게 TV 출연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그녀는 수 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무대위의 주인공으로 선정된다. 남의 일이라 믿었던 각광이 그녀의 삶에 등장한다. 하루 아침에 벌어진 이 놀라운 일은 젊고 날씬하던 자신과 자신의 곁을 지켜주던 남편, 아들의 졸업으로 빛나던 과거의 어느 때를 상기시킨다. 사라는 곧 다이어트를 결심한다.


아들 해리는 친구들과 함께 마약 중개 사업을 구상한다. 품질 좋은 약을 조금씩 쪼개 팔아 마진을 남기려는 계획이다. 각성제 세 알을 나눠 삼킨 이들은 터지는 감각에 기대어 구체적인 얼개를 짜기 시작한다. 자극 받은 중추는 시간을 가속화 시키고, 신경에 불꽃을 일으킨다. 그들은 섬광처럼 지나가는 아이디어를 붙잡아 거래 대상을 물색하고, 접선 장소를 떠올린다. 무료와 권태를 견디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므로 지루할 틈이 없다. 운동성이 증폭된 뇌가 사고하는 방법을 잊기 시작해도 아랑곳없다. 그저 자극과 침잠, 더 큰 자극과 더 낮은 침잠이 반복될 뿐이다.


끝내 퍼센트가 높은 약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사업을 빌미로 품질 확인 차 자신의 팔에 마약을 주사한다. 이 시점을 계기로 그들은 중독의 초입에 들어선다. 경구에서 혈액으로 약의 종류와 주입방식이 변모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마약은 돈과 필요 두가지 요건을 충족한다. 약을 구매하려는 사람을 상대로 돈을 벌지만, 그들 역시 마약이 필요한 몸이다. 팔 것인가, 취할 것인가. 물론 아직은 파는 쪽이다.


설탕과 육류가 없는 사라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허기와 홀로 싸우던 사라는 친구의 권유로 병원을 찾는다. 그곳은 식욕억제제를 처방하는 의사가 상주하는 곳으로 나약한 의지가 아닌 현대 의학 기술을 쐴 수 있다는 낙관이 만연한 장소다. 의사는 사무적이고 냉담한 태도로 단순한 처방만을 내리지만, TV출연이 시급한 사라는 배불리 먹으며 체중을 줄일 수 있다는 모순을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외로움과 공허함은 불행으로 가는 땔거리가 된다. 사람에 대한 혹은 물질에 대한 허기가 만성으로 치달은 인물들의 해결방식은 다분히 소모적이어서 자멸의 길을 자처하지만, 음지에서 자행되어 소리나지 않는다. 현대 사회가 정의내린 사회적 질병임에도 예방의 그물은 무척이나 성글다. 헛헛한 감정의 지속은 한 개인이 얼마나 쉬이 사각지대로 들어서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2. JUMP

10-12컷의 화면이 0.5초마다 하나씩 지나가고.

저작운동이 아닌 시작과 끝, 다시 말해 먹기 전의 식탁과 먹은 후의 사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하나의 씬이 완성된다. 극 중의 인물들은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을 건너뛰는데, 이 과정에서 맛을 느끼고 식감을 즐기는 장면은 과감히 생략된다.

영화는 속도와 화면 분할, 시간의 분절을 통해 인물들의 감정과 욕망을 드러낸다. 같은 공간에 속해 있지만, 각각의 프레임에 갇혀 버린 자폐적 상황과 어긋난 관계를 하나의 화면 안에 배치하는 것으로 입장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서사의 흐름이 가속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도원경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암시한다.

중독이 깊어지고 환각에 취해 착란 증세를 보임에 따라 편집 방식도 조금씩 변화한다. 핸드헬드 기법이 그것이다. 영화는 꼬여버린 상황만큼이나 혼란한 머릿 속을 가장 동적인 방식으로 구현해 낸다. 극에 치달은 관계와 더불어 금단 증상으로 인한 불면의 밤, 구토 나는 내장을 감각해야 하는 인물들의 오심을 어안과 흔들림, 비좁은 거리감으로 표현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들의 얼굴은 주변을 인식 하지못한 채 망상 속을 휘달린다. 카메라는 그들의 동선을 따라가고, 발길이 멈춘 곳에서의 욕망을 포착하며, 이후의 무력과 패배감에 잠식당하는 과정을 거르거나 삭제하지 않고, 정속에 맞춰 세부적으로 재생한다. 이는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게 되는데, 덕분에 그들의 비참, 수치, 산란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마약에의 갈망을 코앞에서 목격하는 목격자가 된다.


3. REQUIEM

영화는 여름부터 시작한다. 정오의 태양이 뜨고, 석양이 지는 보편의 어느날로부터 파생된다. 외로움과 다툼, 재의 결핍으로 점철 된 현실이 버거운 이들은 우연히 찾아든 기회 앞에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현실을 떠난 이들의 처음은 순조로웠다. 쏟아지는 수요에 환호했고, 간단한 방식으로 몸의 크기를 줄여나간다. 덕분에 막대한 현금을 모으고, 이웃들의 관심도 얻었다. 그러나 노동과 절식없이 얻은 부와 명예는 삶의 근간을 조금씩 파먹기 시작한다.


마약을 팔아 커다란 TV를 사 들고 본가로 돌아온 아들 해리는 이를 가는 사라의 행동을 보고 그녀가 복용하는 다이어트약이 각성제임을 단박에 알아챈다. 해리는 엄마의 약물중독을 걱정하지만, TV출연이 중한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아들에게 자신의 출연 소식을 알리고, 빨간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상상하지만, 해리는 다이어트약의 위험성에 대해서만 경고한다.


아들의 말이 서운한 사라는 출연 확정 이후 높아진 자신의 인기와 미래에 벌어질 유명세에 대한 기대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녀는 과거의 행복과 가족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에 대해 털어놓는다. 역할이 사라져 자신의 쓸모를 고민하는 엄마의 고백은 아들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눈물을 흘리던 해리는 마약을 주사하는 것으로 슬픔의 순간을 즉시 털어버린다.


꼬여버린 관계와 엉겨있는 사건을 가닥가닥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면역을 생성한다. 복기해야 항체를 형성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행은 삶에 있어 항원과 동의어이다. 유비없이 노출된 신체는 방어를 모른다. 그저 뇌를 속이는 것으로 문제를 모면할 뿐이다.


가을걷이 없는 겨울이 찾아온다. 마약상들 사이의 분쟁으로 인해 거래가 끊긴다. 그로 인해 해리와 타이론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다. 하지만 돈보다 시급한 것은 약이다. 제 기능을 잃어버린 신체는 약 없이 버틸 수 없다. 해리는 돈을 구하기 위해 매리온에게 매춘을 강요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진다. 매리온은 자신의 성을 팔아 돈을 마련하지만, 해리는 약을 얻지 못한다. 금단 증상으로 이성을 잃어가던 해리는 마약을 구하기 위해 타이론과 함께 플로리다로 향한다.

사라의 증세는 더욱 심각하다. 티비 속 그림이던 환상은 이제 그녀의 집 내부로 침입한다. 굉음을 내는 냉장고는 시시각각 그녀를 위협하고, 무방비한 그녀를 찾아와 인터뷰를 시도하는 제작진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다. 반복되는 환각에 괴로워하던 사라는 자신이 직접 방송국을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빨간 드레스를 입고 거리를 나선 사라의 모습은 정신이상자에 가깝다.


결말은 파국이다. 타의에 의해 지상으로 끌려 내려온 이들은 팔을 잃고, 충격파 치료를 받으며, 강제 노역을 하거나 자아를 팔아 더 많은 양의 마약을 얻는다. 거짓으로 점철되었던 그들의 꿈은 더 잃을 것이 없어진 후에야 조각난다. 악몽보다 더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음은 덤이다. 남은것이라곤 아무런 희망 없이 망가져버린 육체뿐이니까. 이것이 가상에 현실을 바친 자들의 최후이다. 겨울을 지난 그들에게 돌아오는 봄은 없을 것이다. 환상을 위해 현실을 바친 대가로 죽음보다 못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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